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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피우지의 크리스마스 콘서트

by Bora

크리스마스가 며칠 뒤로 다가오면서 내가 사는 동네 피우지에도 점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거리 곳곳마다 크리스마스 조명에 불이 들어와서 반짝이니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난다.


우리 집 아래쪽의 광장도 제법 멋진 야경을 선사하고 있다,


오늘부터는 피우지 온천 앞 도로를 따라 간소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섰다.

한번 죽 둘러봐도 시골 동네라서 그런지 딱히 눈에 들어오는 상품은 없다. (원래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이란 것이 살 물건이 없기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긴 하지.)


오후에 광장 쪽에서 음악 소리가 울리길래 가봤더니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나 이탈리아나 시골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썰렁해 보이는 건 나이 먹은 우리의 입장, 산타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는 아이들의 얼굴은 그저 신나서 웃음이 가득하다.


지난주 윗마을인 피우지 시타에 올라갔다가 시청 게시판에서 크리스마스 콘서트 포스터를 발견했었다. 12월 21일에 시청 바로 옆 오페라 극장에서 콘서트가 열린다고 했다. 당장 예약해야지. 그런데 Ingresso Libero? '인그레소 리베로가 뭐지?' 이탈리아어 검색을 해 보니 무료입장! 오오 굿!


공연 시간은 밤 9시. 저녁 먹고 느긋하게 윗마을에 올라가 공연을 보기로 했다.

작은 기대를 갖고 길을 나섰다. 윗마을로 올라가는 마지막 버스는 8시 반 출발이다. 버스 승객은 우리 둘 외에 어떤 아주머니 하나. 버스 종점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정적이 감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오늘 콘서트 있는 게 맞는 건가?’ 캄캄한 계단을 올라가며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오페라 극장 앞에 다다르자 화려한 조명 속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페라 극장 옆의 시청 건물도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빛나고 온 거리가 가로등 불빛 아래 반짝인다.


파티 복장까지는 아니어도 다들 점잖고 우아한 옷차림이다. 아이들은 산타 모자를 쓰고 신난 얼굴들이다. 아무 점퍼나 걸치고 마실 나온 우리의 차림새가 조금 미안해진다.


로비에 서있는 사람들을 지나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1층, 2층 합해서 300석은 돼 보이는 자리가 거의 다 찼다. 과하지 않은,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공간이다. 이 정도 규모의 도시에 이만한 극장이라니, 피우지의 깊은 역사를 짐작하게 해 준다.

2층 맨 앞자리가 비어있길래 얼른 앉았다. 9시가 조금 넘어 연주자들이 들어온다. 얼추 40명쯤 되어 보인다.

자세히 보니 현악기가 없다. 관악단이라...


'현악이 빠지면 연주곡이 한정적이겠군.'

생각하는 순간 지휘자가 등장하고 크리스마스 콘서트가 시작됐다.

연주자들의 나이 구성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골고루 섞여 있다. 동네 오케스트라로서는 환상적인 조합이다.


연주 레퍼토리는 좀 생뚱맞았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연주곡을 기대했건만 선곡은 거의 미국 음악이다. 조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 레너드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삽입곡, 그리고 영화 <쥐라기 공원>과 <스타워즈>의 사운드 트랙까지 미국적인 멜로디가 이어진다. 뒷부분에 선심이나 쓰듯이 겨우 '크리스마스 캐럴 메들리'가 나왔다.


그리고는 관악단원들이 자리를 정리한 다음에 열댓 명의 동네 어린이들이 각기 악기를 들고 무대로 올라와 어른들과 함께 협연을 하고 다시 성탄 복장의 꼬마들까지 모여 불을 끄고 마지막 곡을 연주한 후 공연이 끝났다.


관악단의 연주는 나쁘지 않았다. 공연장의 크기며 관중들의 호응도 모두 적절하고 좋았다. 공연의 수준은 아쉽지만 동네잔치, 아이들을 비롯해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크리스마스 이벤트라고 생각하면 의미 있고 따뜻한 콘서트다.


밤 11시가 넘어 공연이 끝나고 우리가 사는 아랫마을까지 30분을 걸어 내려왔다. 12월 말인데도 춥지가 않다.

"아아, 로마에서 제대로 된 공연 보고 싶다. 이탈리아까지 와서 오페라 공연 한 번쯤은 봐줘야지!"

J가 볼멘소리를 한다.

“이보세요, 공연이야 나도 당연히 보고 싶죠. 하지만 테르미니역에서 피우지로 출발하는 막차가 8시 반에 떠나는데 공연 끝나고 집에 어떻게 오려고? 로마에서 그냥 날밤 새게?”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막차 때문에 동동거리는 현실이 이와 비슷하려나? 우리야 놀러 왔으니 사정이 다르지만 피우지 주민들의 경우엔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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