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내 평생에 로마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을 일이 또 있을까.
하필이면 성탄절 날 바티칸에 가려다가 일어난 사고로 인해 교황님의 성탄 미사는 TV를 통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한국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발코니에 나온 교황님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깨알같이 작게 보이더라도, 인파에 묻혀 아예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현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결국 퉁퉁 부은 팔꿈치를 부여잡고 성탄절을 허무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도 참 무심하시지.
"안 되겠어. 일단 부목을 대야겠어."
머플러를 접어 삼각건을 만들며 J는 뭔가 신이 난 얼굴이다.
"옛날 교련 시간에 배운 게 수십 년 지나서 이렇게 쓰일 줄이야. 삼각건 접는 법이 아직까지도 생각이 나다니 신기하군"
"이게 재밌어? 거 참 연구대상이네"
오른손으로 다친 팔을 살짝 받쳐주기만 하면 괜찮은데 J는 한사코 삼각건을 하고 있으란다.
다음날 새벽. 하루를 자고 일어나도 팔꿈치는 여전히 부어 있고 변함이 없다.
팔뚝이 아주 건장해져서 이 정도 굵기라면 역도 선수를 해도 될 것 같다. 실상은 가벼운 컵 하나도 들 수 없는 처지이지만.
오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피우지 마을의 목요 시장이 열리는 날, 지난번 장날 구입했던 맛난 올리브 절임도 다 떨어졌고, 다른 살 것도 많은데 시장 방문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목요 시장 열릴 때 윗마을에 들러 꼭 먹으려고 했던 성당 골목 맛집의 인생 퐁듀도 못 먹게 됐다.
J도 시장에 가고 싶은가 보다.
"아침에 얼른 목요 시장 들러서 장 보고 출발하면 안 될까?"
나도 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했지만 은근히 심통이 난다.
"시장에 갔다가 오전 뒷시간 버스 타고 로마 나가면 오후에나 병원 도착해. 내 팔이 중요해? 올리브 절임이 중요해? 정말 너무하네"
“그게 아니라 당신이 목요 시장을 아쉬워하니까 그렇지” 하면서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침 버스를 타고 로마로 출발했다.
이탈리아는 12월 26일이 성 스테파노의 축일로, 성탄절에 이어지는 연휴이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이 날은 공휴일이다. 평일이라면 출근시간이라 길이 엄청 막힐 텐데 휴일 덕분에 일사천리로 달려와 로마 테르미니역에 내렸다. 여기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로마시 북쪽에 있는 파이데이아 국제병원으로 향했다.
파이데이아 병원은 뒤로 드넓은 공원을 품고 있는 현대식 건물이다. 병원 같지 않게 전체적으로 파란색 인테리어를 해 놨다. 보통 파란색은 차갑고 불안해서 병원에는 잘 쓰지 않는 색인데, 그래도 멋지다. 여긴 이탈리아잖아.
휴일이어서인지 병원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건물 내부가 고급스러워서 '이 병원은 진료비가 꽤 비싸겠군' 하는 생각이 들지만 큰 걱정은 없다. 이럴 때 쓰려고 여행자보험을 들어두는 것 아니겠는가?
안내 데스크에서 등록을 하고 잠시 기다리자니 당직 의사가 나타나 자신은 루이지라고 소개한다. 나이로 짐작하면 레지던트인 모양이네.
응급처치실 같은 방에 들어가 퉁퉁 부운 팔꿈치를 살펴보곤 초기 진단서를 작성했다. 그리고선 X레이를 찍어야 하는데 오늘 휴일이라 방사선과 의사가 출근하지 않았으니 지금 호출을 하겠다며 30여분 기다리라고 한다.
30분 만에 방사선과의 파올로 교수가 나타나서 X-Ray실로 안내했다.
X레이 기계는 한눈에 봐도 최신식이다. 다양한 방향에서 내 팔을 촬영한다. 우리나라 병원과 달리 기계 옆에 모니터가 있어 X레이로 촬영된 영상이 내게도 보인다.
'저게 뭐지? 아래쪽이 떨어져 나간 것 같네.'
통증이 별로 없어 내심 인대나 조금 늘어난 정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뭔가 불안하다.
촬영이 끝나고 X레이실을 나왔다. 루이지가 “미안합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는데, 골절입니다”라고 얘기한다.
‘당신은 미안할 것 없어요. 내 잘못이죠. ㅠ’
엑스레이에 의하면 팔꿈치 뼈 한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한시바삐 수술을 해야 하는데 오늘 휴일이라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일단 정형외과 의사와 간호사를 호출하겠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집에서 휴일을 즐기던 사람들 여러 명 고생하게 생겼다.
‘골절이면 꼭 수술을 해야 하는 건가? 한국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 골절 수술을 이탈리아에서 해야 한다고? 작년에 골다공 수치가 높아 충격받았었는데 이번 골절이 골다공증과도 관계가 있는 건가?’
정형외과 의사를 기다리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한국에서 출발 직전에 이런 사고가 났다면 당신은 여행을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여행을 취소해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하지만 모든 교통, 숙박 예약이 이미 끝난 상태였잖아"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일이다.
여행 초반에 이탈리아에서 사고가 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탈리아에 이어 튀니지, 북유럽 여행도 환불 불가로 대부분 예약이 끝났는데 이를 어쩌나.
이번 여행 기간중에 요가를 좀 해보려고 여행용 요가 매트도 가져왔는데 이제 겨우 다섯 번이나 했나? 슬슬 이탈리아 생활 자리도 잡았겠다 앞으로 꾸준히 해봐야지 하는 이 시점에 팔이 부러졌으니.
이 참에 한 팔 요가를 개척해 봐?
병원의 긴급 호출을 받은 정형외과 의사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왔다. 멋진 녹색 코트 차림의 젊은 여의사다. 어깨에 멘 마이클 코어스 숄더백은 병원의 컬러와 똑같은 파란색. 이탈리아는 의사도 멋쟁이네.
실비아 박사는 가운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바로 진료를 시작한다.
"사고는 어떻게 난 거예요? 손가락 움직여 보세요. 느낌이 있습니까? 통증은 어느 정도죠?"
"다른 병이 혹시 있나요? 매일 약 먹는 건? 알레르기는 어때요?"
골다공 수치가 좀 낮은 것 외엔 없다니까 "퍼펙토"란다.
골절된 부분 수술을 하고 깁스를 해야 한단다. 수술팀을 조직해야 하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고 가능하면 내일 오후에 하자고 한다.
신뢰감이 솟는다.
당장 입원을 하라길래 오늘은 집에 갔다가 내일 짐 챙겨서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일 수술을 할 때까지만이라도 깁스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일단 깁스를 하면 상의를 벗을 수 없다며 가위를 들고 스웨터의 왼쪽 소매를 절단하려 든다.
"잠깐만! 벗어서 이쪽 팔만 뺄게."
옷도 몇 벌 없는데 한 벌 못쓰게 될 뻔했다.
역시 긴급 호출을 받은 간호사가 도착해서 깁스를 하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호기심이 많아 깁스를 하는 동안 계속 질문을 던진다. “한국인이면 북한이에요? 남한이에요? 로마엔 왜 온 거죠?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실비아 박사는 내 팔을 90도로 꺾고 쓱싹쓱싹 석고를 붙여나간다. 아주 숙련된 솜씨다. 금세 깁스 작업을 끝내더니 마지막 압박 붕대 색깔을 고르라고 한다. "노랑도 있고, 빨강도 있고... 참, 핑크도 있어요. 핑크로 해 줄까요?"
그냥 녹색으로 해 달라고 했지만 하고 나서 보니 살짝 후회가 된다. 뭔가 촌스러운 것 같아.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오늘치 치료비를 정산했다. 헉, 917유로! X레이 찍고 석고붕대 한 것뿐인데 백수십만 원 이라니!
청구서를 보니 휴일에 진료를 하면 과외 진료비가 붙는 것이었다. 오늘 당직 의사인 루이지 코리아의 진료비만 정상 요금이고, 방사선과 파올로 파보네 교수 ‘휴일 긴급 상황 진료비’ 추가, 정형외과 실비아 카르다렐리 박사 ‘슈퍼 홀리데이 진료비’ 추가... 등등
슈퍼 홀리데이는 뭐지? 나야말로 크리스마스에 진짜 슈퍼 홀리데이를 맞았네. 아까 의사가 보험 있냐고 묻던 게 이렇게 비싸서였나?
내일 수술을 하고 2박 3일간 1인실에 입원하면 도대체 얼마를 받으려고!
진료비가 보험 보장액을 넘어설까 걱정이 늘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