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로마가 최고!
부러진 팔꿈치는 수술이 잘 된 것 같다. 성탄절 날 바티칸 미사에 가려다 사고가 났는데 퇴원 다음날은 12월의 마지막 일요일, 매월 마지막 일요일은 바티칸 박물관 무료입장의 날이다.
수술도 끝나고 퇴원까지 했으니 다행히 갈 수 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바티칸에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깁스한 팔을 부여잡고 피우지 마을에서 출발하는 새벽 버스를 탔다. 로마 테르이니 역에서 바티칸 박물관까지 메트로를 타고 갈 때 가장 가까운 역은 치프로 역이다. 치프로 역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그전 역인 오타비아노역에서 대부분의 승객이 내린다. 뭐지? 어리둥절하게 앉아있다가 문 닫히기 직전에 따라 내렸다. 지상으로 올라온 후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 걸어가는 방향으로 따라가기로 했다.
5분쯤 걸었나? 바티칸 성벽이 보이면서 줄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진다. 수백 미터를 바삐 걸어 다행히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줄 끝자락에 붙었다.
여기서부터 바티칸 박물관 입구까지는 700미터, 우리 뒤로 금세 2중, 3중의 대기 줄이 이어졌다. 바티칸 뮤지엄에서 가까운 치프로 역에서 내렸으면 줄을 따라 여기까지 1킬로미터 이상을 다시 걸어와야 할 뻔했다. 역시 사람은 상황 판단을 잘해야 돼. 우리가 줄 선 시각이 8시 반, 박물관은 9시에 문을 연다.
나는 지금까지 바티칸 방문이 세 번째, J는 베드로 광장만 봤고 안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결혼하기 전인 1987년에 처음 바티칸을 찾았던 J는 그 이후 여러 차례 로마를 방문했지만 바티칸 입장 줄 서는 게 귀찮아서 매번 포기를 했다는 것이다. 어찌 그리도 줄 서는 것을 싫어하는지...
나의 경우, 앞의 두 번은 가이드 투어로 왔었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가이드의 복잡한 설명과 인파에 질려 이번에는 좀 자유롭게 박물관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예약 없이 그냥 입장해도 되는 매달 마지막 일요일의 무료 관람 이벤트였다. 이 날이 되면 바티칸 담장 밖으로 수천 명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9시 정각이 되자 입장이 시작됐다. 우리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대략 1천 명 정도? 그런데도 생각보다 줄이 쑥쑥 줄어들어 10시도 되기 전에 바티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권 검사도 안 하고 가방 X레이 검사만 한 후 프리 패스다. 무료입장일이라 평소보다 훨씬 사람이 많을까 걱정했었는데, 관람객이 생각만큼 많지 않아 도리어 평일 예약 관람보다도 더 한가하다.
하긴 로마에 오는 사람 중에 바티칸 무료입장 날짜를 기다렸다가 거기 맞춰서 방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편 지금이 겨울철 비수기라서 사람이 적은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12월 마지막 주인데도 기온이 어찌나 온화한지 코트도 필요 없을 정도다. 한국의 3월 말 날씨 정도? 여름의 바티칸은 실내에 에어컨도 없는 데다 인파까지 몰려 지옥에 가까울 정도다. 9월에 로마에 함께 와서 따로 바티칸 투어를 했던 친구네도 투어가 끝나고 혼이 빠져 고개를 흔들었었다. 사람들의 땀 냄새가 가장 힘들었다며.
그런데 오늘은 너무나 여유롭다. 인기 있는 장소라도 떠밀려갈 정도의 인파가 아니라 적당하게 빈 공간이 생긴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럽다. 라파엘로의 방을 지나 태피스트리와 지도 갤러리도 머무르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가이드 뒤로 생각 없이 졸졸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 페이스에 따라 맘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충분히 감상을 하며 다닐 수 있으니 그만큼 힘도 덜 들다. 그전에 왔던 바티칸을 떠올리면 인파 속에서 천장만 쳐다보며 가이드 따라다녔던 기억밖에 니지 않는다.
마지막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천장화도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다가왔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아래에서 목을 꺾어 한참을 바라본다. 미켈란젤로는 어떻게 천정에 저런 어마어마한 그림을 다 그릴 수 있었는지 천재의 걸작 아래에서 인간 능력의 무한함에 그저 경탄할 뿐이다. 천장화의 가운데 자리한 '아담의 창조', 인간 아담과 창조주 하느님 손끝이 닿을 듯하다. 생명을 불어넣는 순간을 저렇게 형상화할 수 있다니, 똑바로 서서 벽에 그려 넣어도 불가능할 것 같은 그림을 누워서 그렸다니, 생생한 그림 하나하나가 경이롭기만 하다.
나는 바티칸의 야외 정원이 좋다. '정화"의 뜻을 품고 있는 솔방울 정원 벤치에 앉아 조각상과 한겨울에도 푸르른 나무들을 보기만 해도 좋고 거대한 조각 '천체 안의 천체'도 재미있다.
바티칸 무료입장일의 폐관 시각은 오후 2시이고, 마지막 입장 시각은 12시 반까지다. 정원의 맛있어 보이는 야외 카페테리어에서 한가롭게 점심을 먹고 쉬다가 다시 천천히 이 공간을 만끽하고 싶다.
그러나 깁스 한 팔로 새벽부터 움직이니 좀 힘들다. 팔을 무언가가 아래에서 끌어내리는 느낌, 조이고 당기는 느낌이다. 무리하지 않고 조금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12시 넘어 나왔는데도 입구의 줄은 여전히 이어져 있다. 저 사람들이 모두 입장 마감 시간인 12시 반 전에 입장할 수 있으려나? 2시에는 나가야 하는데 들어가자마자 시스티나 성당까지 달리기를 하면 천지창조를 볼 수가 있을까? 염려가 된다.
우리는 테르미니 역에서 1시 버스를 타고 일찌감치 우리 집이 있는 피우지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던 바티칸 방문. 따사로운 햇살 아래 이탈리아 살기의 보람을 느끼게 해 준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