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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로마의 연말

테베레 강변 산책과 포폴로 광장

by Bora

2024년 마지막 날, 제야의 종 대신 이탈리아에서는 새해맞이 불꽃놀이가 터지는 날이다.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볼까?”

이틀 전 바티칸에서 받은 감동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J는 다시 바티칸으로 가서 못 본 것들을 다시 보자고 한다.

좋지. 나는 로마 구경은 무엇이든 좋으니 아무 데나 가자고 해도 오케이다.


로마 지하철 A 라인의 오타비아노역에서 내려 이틀 전에 입장을 위해 줄을 섰던 바티칸 성벽을 지났다. 오늘은 줄이 없는 대신 저 앞 베드로 광장 입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베드로 성당 들어갈 때만 짐 검사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냥 베드로 광장 들어가는데도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한다, 보통 베드로 광장은 자유롭게 통행했었는데 오늘은 아닌가 보다.


광장 안에는 곳곳에 목제 바리케이드로 공간이 분리된 채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귀동냥으로 오늘 베드로 성당은 출입 불가이고, 잠시 후 광장에서는 초대장을 가진 사람만 참가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는 것 정도만 알게 됐다.


그럼 베드로 성당을 포기하고 산탄젤로성(성천사성)으로 가서 지난번에 걸었던 테베레 강의 나머지 북쪽을 걷지 뭐.

성 베드로 광장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광장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마련된 내티비티 씬(Nativity Scene) 전시를 둘러봤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무렵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던 순간의 장면을 그림이나 모형으로 표현하는데, 가톨릭 신자들은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을 받는 듯하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와 동방박사 이야기는 뻔히 아는 내용이라 무신론자인 내 눈에는 별 감흥이 없다.


바티칸에서 나와 산탄젤로성으로 가기 위해 성베드로광장부터 곧게 뻗은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Via della Conciliazione) 거리를 걸었다. 뒤돌아볼 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성 베드로 성당의 웅자한 자태뿐만 아니라 길 양쪽의 다양한 작은 성당까지 눈이 쉴 틈이 없다.


다시 걸어도 참 아름다운 길이다. 바티칸에서 산탄젤로성까지는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비밀 육교가 연결돼 있지만 일반인은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피우지 마을에서 처음으로 로마 나들이를 한 날 테베레 강변을 거닐었었다. 로마 시내를 관통하는 테베레 강에는 티베리나라는 이름의 아주 작은 섬이 있다. 가로길이가 약 270미터, 세로 폭이 불과 67미터 밖에 되지 않는 돛단배 모양의 이 섬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불과 1분이면 반대편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꼬마 섬이다.


티베리나 섬으로 연결되는 파브리치오 다리를 지나 테베레 강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기원전 62년에 건설되어 현존하는 로마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파브리치오 다리는 2천 년이 넘는 역사가 보여주는 듯 고풍스러우면서도 굳건하기만 하다.


테베레 강은 강의 양쪽으로 아래쪽과 위쪽에 별도의 산책로가 있어 네 가지의 강변 산책로 중 내키는 대로 선택할 수가 있다.


우리는 지난번에 아래로 내려가 급류로 휘몰아치는 테베레강의 물살을 보다가 다시 위로 올라와 강변 풍경을 감상하고 로마의 역사와 궤적을 함께 한 다리들을 이리저리 건너기도 하면서 테베레강을 마음껏 즐겼었다.


이번에는 산탄젤로성 바로 아래쪽에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다리로부터 강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다리에서 보는 산탄젤로성은 테베레강에 성이 반사되면서 로마 최고의 경관을 선사한다.


홀린 듯 테베레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이어서 산탄젤로 다리가 나온다. 다리 기둥마다 웅장한 조각이 세워져 있어 로마의 모든 다리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을 받는 다리다.

백옥 같은 천사들의 조각상 사이를 걸어 정면으로 산탄젤로성을 바라본다. 로마 제국 시절 오현제 중 하나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로 세워졌다가 교황청 소유로 바뀐 성이다.


산탄젤로성 안에 있는 카페를 참 좋아하지만 오늘은 들어가지 않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걸로 만족한다.


산탄젤로 다리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강변 풍경도 정말 좋았다. 파리 센 강변이 생각나는 야외 노점들을 지나 눈이 번쩍 떠지는 이탈리아 대법원 건물의 위용에 놀란다.

지금은 비록 공사 중이라 장막에 가려있지만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에 올라탄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를 묘사한 청동상은 대법원 지붕 위에서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이 연상된다.


강변을 걷다가 몸을 뒤로 돌릴 때마다 멀리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돔과 산탄젤로성이 테베레 강과 어우러지며 계속 눈에 들어온다.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나뭇가지들이 얼마나 무성하게 강가를 덮고 있는지 여름이면 짙은 나무 그늘이 더위를 충분히 막아줄 것 같다.


로마에는 볼거리가 너무도 많아서일까. 테베레 강 풍경이 이렇게나 멋진데도 여기까지 찾아와 강변길을 걷는 관광객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나 역시도 짧게 로마를 방문했다면 테베레강을 따라 걸어볼 엄두를 내진 못했을 것이다. 로마 근처에 살기 때문에 얻게 된 소중한 기회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2024년 마지막 날의 대미는 테베레강에서 멀지 않은 포폴로 광장에서 끝내기로 했다. 포폴로 광장은 북쪽에서 로마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포폴로문 안쪽에 조성한 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이집트에서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고 거기서부터 광장 남쪽으로 세 갈래의 화려한 길이 방사상으로 뻗어나간다.


세 개의 길은 모두 화려한 크리스마스 조명 아래 반짝이고 있다. 새해 첫날 오후에 이 길에서는 모두 합쳐서 1천 명이 넘는 악대가 참가하는 로마 퍼레이드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포폴로 광장은 요란하기로 유명한 로마의 연말 불꽃놀이 장소 가운데서도 명소로 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저녁을 맞아 광장은 흥겨운 음악과 몰려나온 행인들로 활기가 넘친다.


광장 한가운데 로마 시내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생나무를 그대로 잘라온 이 크리스마스트리는 원래 전통적으로 베네치아 광장에 설치되는데, 올해는 베네치아 광장의 지하철 공사 때문에 포폴로 광장에 세우게 됐다고 한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느라 고개를 들어보니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핀치오 테라스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저기를 안 올라갈 수는 없지.

오랜만에 흙을 밟으며 산길을 따라 테라스에 오르자 여기가 바로 일몰 명소, 바티칸 경관 명소였다. 저 멀리 성 베드로 성당과 산탄젤로성, 로마 도심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아래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까지 그냥 여기서 새해 첫날을 맞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장소다.


포폴로 광장에서 출발하는 세 갈래의 길에도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각각 스페인광장, 베네치아광장, 나보나광장까지 로마 중심부를 관통하는 길이다. 화려한 상점 사이사이에 거대한 성당이 무심히 나타난다.


도대체 로마의 얼굴은 몇 가지일까.

봐도 봐도 새롭고, 탄성을 자아내는 장소가 끊이지 않으니 이번에도 로마를 제대로 다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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