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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테르미니역에서 놀기

by Bora

피우지에 살면서 가장 많이 방문하게 된 곳이 로마행 버스가 도착하는 테르미니역이다. 이미 서른 번 넘게 들락거렸다.


'종착역'이란 뜻의 테르미니는 로마에서 가장 큰 기차역으로,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역과 같은 곳이다.

현재의 역 건물은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에 지었는데, 지금 봐도 모던한 건축 디자인이 멋지다.


피우지와 로마 테르미니 역 사이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네댓 번만 운행하기 때문에 꼭두새벽에 여기 도착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저녁 시간에 버스를 기다리며 식사를 해결한 적도 꽤 있다. 덕분에 테르미니 역 주변은 로마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구역이 되었다.


테르미니 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역사를 나서려는데 입구에서 포옹하는 연인이 보인다. 헤어지는 걸까? 다시 만난 걸까? 그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느끼는 순간, J가 사진을 찍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초상권부터 따질 듯싶은데 오히려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리며 열렬한 키스를 시작한다. 얼마든지 찍으라는 얼굴로 한참이나 포옹과 키스를 계속하고는 웃으며 하는 말이 '땡큐!'

역시 로마다.


테르미니역 바로 앞은 버스정류장들이 모여 있는 친퀘첸토(500) 광장이다. 1887년 에리트리아 도갈리(Dogali) 전투에서 산화한 이탈리아 군인 578명을 기려 '500 광장'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테르미니역 주변에는 걸어 다니며 방문할 수 있는 볼거리가 많다.

그중 1순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터가 아닐까 싶다. 로마 황제들이 건설한 수많은 목욕장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군데군데 허물어져서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친퀘첸토 광장을 지나면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을 정면으로 만날 수 있다. 그중 일부 건물을 개조하여 로마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현재 발굴 중인 욕장의 반원형 벽면과 바닥의 모자이크 타일도 볼 수 있다. 박물관 내부에는 ㅁ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회랑을 따라 수많은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을 나와 밖으로 돌아가면 욕장 터 끝자락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있다. 일반 성당과는 다르게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의 흔적이 살아있는 특별한 건축물이다.


성당의 출입문부터 특이하다.


안에 들어서면 사방으로 압도적인 벽면과 함께 천장과 바닥에서까지도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고대 목욕장을 성당으로 활용한다는 생각 자체가 로마스럽지 않은가.


여기서 길을 건너면 베르니니의 조각품 '성녀 테레사의 환희'가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이다.


다른 도시에서라면 존재만으로도 손꼽힐 대단한 성당들이 테르미니역에서 걸어서 5분 이내 거리에 있는 것이다.


로마 4대 성당 가운데 하나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도 빠뜨릴 수 없다. 테르미니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이 성당은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크리스마스트리까지 있었다. 평화의 기둥 앞에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가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성당을 배경으로 반짝였다.


성당에 들어서자 텅 비어있는 안쪽에서 성가가 울려 퍼진다. 성전 앞쪽 지하의 아늑한 공간에서 신부님 세 분이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미사를 드리는 신도는 열 명 남짓. 이 아름답고 거대한 대성당에서 이토록 소박한 미사라니. 기도하는 마음이 더욱 하늘에 닿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이런 작은 새벽 미사는 거의 매일 열린다. 그저 성당 안 벽화만 구경하기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테르미니역의 화장실 정보.

유럽의 기차역 화장실은 대부분 유료다. 테르미니역 지하에 있는 화장실 역시 1유로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한 번 썼지만 나는 천오백 원이나 내고 화장실을 이용하는 게 무척이나 불편했다.

테르미니역 가장 안쪽 푸드코트의 화장실을 알고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우리가 처음 갔을 때 공사 중이어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던 화장실은 한 달 넘은 공사 끝에 유료로 바뀌었다. 그러나 1유로 조금 넘는 커피만 마셔도 나오는 푸드코트 영수증의 QR코드를 찍고 들어가면 된다. 횟수 제한 없이 4시간 유효한 기특한 QR.


푸드코트의 이름은 '메르카토 센트랄레 로마'(Mecato Centrale Roma). 질 좋은 스테이크부터 햄버거, 피자, 파스타, 디저트 등 다양한 가격대의 음식들을 원하는 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 우리도 골고루 먹어보았지만 여기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안쪽 끝의 트라피치노(Trapizzino). 5유로에 맛있는 파르미지아노 가지요리가 바삭한 빵에 담겨 나온다. 치즈와 가지가 부드럽게 섞여있는 맛이 계속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 푸드코트는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든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공항버스가 늘어서 있는 남서쪽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역 건물 안에 코인(COIN) 백화점이 있다.


백화점 매장을 지나면 렌터카 회사 사무실들이 늘어서 있고 그 끝에 푸드코트가 있다. 바로 앞에 피우지 행 버스정류장이 있는 이 푸드코트는 우리의 참새방앗간이었다.


테르미니역에는 카페도 많다. 로마의 분위기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카페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동쪽 끝과 서쪽 끝에 있다. 현대백화점에도 입점해 있는 이탈리아 식당과 같은 브랜드 이탈리(EATALY)는 서쪽 끝 2층에, 미뇬(Mignon) 카페는 동쪽 끝 1층 출구 앞에 있다. 나는 미뇬 카페에 앉아 2천 년 세월의 더께가 묻어있는 로마 시대의 돌담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마시는 카푸치노가 좋았다. 의자도 편하고 가격도 착하다.


테르미니역 근처에는 한국 식재료 마트도 가까이 있다. 이 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이것저것 다루는 곳이 아니고 진정한 순수 한국 식재료 마트이다. 크지는 않지만 필요한 건 거의 다 있다. 가격은 한국보다 살짝 비싼 정도, 손 가는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기특한 가격이다. 종갓집 열무김치도, 간장, 된장, 고추장도, 심지어 꽁치와 고등어도 있다.


나는 여기에서 두부를 여러 번 샀다. 덕분에 이탈리아산 쇠고기에 두부까지 들어간 진정한 된장찌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겨울철 저녁 무렵이라면 테르미니역의 찌르레기 떼도 볼만하다. 우리는 해 질 녘 테르미니역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우지 행 버스는 7시에나 떠난다. 저녁 어스름이 짙게 젖어들어올 무렵이면 테르미니역 주변 하늘 위로 거대한 새 떼들이 출렁거리듯 비행하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 테르미니역에 출몰한다는 찌르레기 떼다. 거대한 새의 무리가 마치 구름처럼, 원형과 타원형, 소용돌이 등의 다양한 형태로 하늘을 뒤덮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찌르레기는 1920년대부터 겨울 동안 로마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세력을 불려 이제는 4백만 마리에 이르는 위압적인 숫자로 증식되었다고 한다. 특히 요즘엔 기후 변화의 결과로 북유럽의 찌르레기가 스칸디나비아에서 지중해로 이동하던 패턴에 변화가 나타나 매년 겨울 테르미니역의 찌르레기는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일몰 30분 전에 나타나 그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이 잡식성 포식자 떼를 퇴치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가 시도되고 있지만 현재는 이 새들이 내려앉는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는 방법 외에는 묘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는 로마 시민이 아니므로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나타나 하늘에서 벌이는 찌르레기들의 화려한 에어쇼를 그냥 즐기기로 했다. 다만 체중을 줄이기 위해 배설기관조차 퇴화되고 없다는 이 찌르레기 에어쇼를 바로 아래서 관찰하기 위해서는 우산이 필수라고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테르미니역에서는 어디서든 볼거리가 널려있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본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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