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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빌라 아드리아나에서 하드리아누스를 생각하며

로마 근교 여행

by Bora

J가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계속했던 말.

"알아볼수록 점점 심란해지는군. 이탈리아에 가 볼 곳이 너무 많아.

'불안하네. 그냥 한 달 살기 하려고 갔다가 한 달 내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하다 오는 건 아닐지'


점찍어둔 로마 근교 당일치기 여행 장소는 점점 개수가 늘고 있다.

일단은 내가 구글맵에서 당일 교통편이 가능한 곳으로 대충 찾았지만 여행 욕심쟁이 J가 어디로 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로마 근교 나들이 장소 중 가장 마음에 끌렸던 곳을 먼저 공부했다.

티볼리(Tivoli)의 빌라 아드리아나부터.


로마 테르미니 역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소도시 티볼리는 고대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끈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즉 오현제 중 한 명이던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별궁이 있는 곳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그가 로마의 식민지와 주변 국가, 특히 그리스와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수집한 예술품을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해 고전주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세심하게 설계한 장소다. 하드리아누스의 '이상 도시'를 현실화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오랜만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2권 한니발 전쟁>, <4권 5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편을 손으로 훑으며 <9편 현제의 세기>를 펼쳐본다.


9편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뼛속부터 로마 귀족 출신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속주 출신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조금씩 비교해 가면서 로마 공화정의 황금시대를 이어간 그의 일대기를 해석해 놓았다.

책에는 빌라 아드리아나 이야기가 따로 한 챕터를 할애해서 자세히 나와 있다.


그는 서기 76년, 고대에는 히스파니아라고 불린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서 태어났다. 오늘날로 치면 스페인 출신인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가문은 원래 아드리아 해와 가까운 중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하드리아가 본향이다.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의 '아드리아 해'라는 바다 이름은 이곳 하드리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로마의 오현제는 모두 혈연관계가 아닌 양자가 황제를 승계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스페인 세비야 인근에 만들어진 로마 퇴역병들의 정착지, 이탈리카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던 하드리아누스는 아버지가 사망하며 후견인으로 부탁했던 트라야누스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의 배려와 타고난 영민함으로 차곡차곡 단계를 밟으며 집정관 등 경력을 쌓다가 전임 황제 트라야누스의 양자가 되었고 결국 41세에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로마 본국이 아닌 속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21년 재위 기간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보냈다.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방위체계를 비롯한 전반적인 안전보장을 재구축, 즉 상황에 맞게 수정하고 보완하여 로마의 황금시대를 이어갔다.


당시 로마 황제의 해외 순행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편안하고 순탄한 여행이 아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군단병과 같이 행군하고 병사들과 함께 막사에서 잠을 자면서 제국의 안보를 위한 구조적인 시스템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지금의 영국 땅에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만들었고, 로마법의 집대성 등 실용적인 치적을 쌓느라 쉴 틈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처럼 바쁜 와중에 건축이 진행된 빌라 아드리아나는 그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고, 편안한 휴식을 꾸던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드리아누스의 빌라가 착공된 시기는 벽돌에 새겨진 글자를 조사한 결과 그가 황제에 즉위한 지 6년 후인 서기 123년으로 짐작된다. 황제는 즉위 후 3년간 로마에 머물다가 제국의 서방과 동방을 오가며 4년 넘게 영토를 시찰했다. 그러니까 3년 남짓 수도에 머무르면서 별궁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부지를 선정하여 기본 설계까지 생각한 후 원정을 떠난 것이다.


그는 별궁을 짓기로 하면서 장소 선택에도 신중을 기했다. 로마에서 동쪽으로 30km 정도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곳, 완전포장된 로마 가도를 통해 로마와도, 아드리아해로도 이어지는 교통이 편리한 곳, 바로 옆에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는 너른 전원 지대 티볼리를 골랐다.


청소년 시절 그는 '그리스 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그리스 문명에 빠졌다 한다. 이렇게 문화적인 소양이 상당하고 취향이 까다로운 사람이 마음먹고 지은 별장, 빌라 아드리아나는 그야말로 웅대한 규모였다.

그리스식 극장과 신전 구역. 상 극장과 도서관, 황제궁전과 황금광장. 경기장과 대욕장. 연못과 타워, 아카데미 건물 등.


빌라 아드리아나의 폐허를 보고 자극을 받은 미국의 대 부호 폴 게티가 미국 로스엔젤리스에 지은 대저택의 규모가 불과 하드리아누스 별궁의 5분의 1이라 한다.


나는 폴 게티 저택 부지에 지어진 LA의 게티 뮤지엄에 가 본 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미술품이 소장된 갤러리의 이름이 게티 빌라. 방대한 컬렉션을 보기도 전에 정원과 그 규모에 압도당했었다. 그런데 그 다섯 배라니.


제국의 동방을 다니는 두 번째 긴 원정을 떠나기 전까지도 별궁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 2차 순행길에서 획득한 수많은 미술품들을 그는 이곳에 모아놓았다. 빌라 아드리아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추억을 모아놓은 곳이다.


[하드리아누스의 빌라에는, 다채로운 대리석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바닥에 최소한의 가구만 놓아둔 실내에도, 가까운 곳에서 강물을 끌어들인 맑은 연못가에도.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말없이 늘어서 있었다.]

- 로마인 이야기 9편


얼마 전 다녀온 그리스의 델로스섬이 떠오른다.

는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에서도 델로스의 그리스 조각상을 보았다. 이런 조각상이 늘어서 있던 곳.


그리스 문명의 정수와 이집트 문화까지, 이 모든 걸 사랑했던 하드리아누스의 독창적인 안목으로 완성한 작품을 티볼리에 가서 볼 생각을 하니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하드리아누스의 사후에도 절대화하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화려함으로 계속 확장되던 이 별장은 로마가 쇠퇴하면서 버려지게 된다. 이후 이민족의 침략으로 인한 약탈과 도굴 등으로 철저히 방치되면서 폐허로 남게 되었다.

대부분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그 방대한 흔적은 남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왠지 보기도 전에 하드리아누스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티볼리에 가면 하드리아누스의 흔적을 과연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꿈꾸던 그의 별궁에 갔다. 마침내!

상상보다 더 대단했고 위대했다.


대형 목욕장만 해도 여러 개에다 수상 극장 등 삼십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나지막한 언덕 사이 산책로를 따라 산재해 있다. 비록 옛날의 화려했던 대리석과 조각, 그림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아있는 터 만으로도 그의 꿈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남아있는 돌기둥과 (조악하게 복원됐을지라도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 주는) 대리석 조각들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상상에 잠겼다.


정작 이런 대작을 완성한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꿈이었던 이 집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국 전역을 쉴 새 없이 다니며 건강을 해친 탓인지 그의 말년은 자기가 만든 휴식처 빌라 아드리아나에서 병마와 싸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처절한 고통 끝에 차라리 자신을 죽게 해 달라며 주치의와 시종들을 힘들게 했다던 그.


흔적만 남은 아름다운 그리스 조각상 앞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예술의 무한함을 느껴본다.


티볼리에 있는 또 하나의 보석 빌라 데스테.

16세기 유럽 정원 예술의 걸작으로 절정기의 르네상스 문화와 예술을 보여준다는 '경이로운 정원' 빌라 데스테 건축도 폐허가 된 빌라 아드리아나에서 그 단초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빌라 데스테도 대단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빌라 아드리아나보다 빌라 데스테에 더 감탄한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여름궁전이 빌라 데스테를 본떠 지은 곳이라 한다. 나는 그 여름 궁전에 두 번이나 갔었다. 정말 러시아 여름 궁전이 생각나는 풍경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여름 궁전
빌라 데스테

빌라 데스테는 물의 정원이었다. 온갖 종류의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르네상스 정원 디자인의 걸작. 너무 화려해서 조금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


J는 둘 중 우열을 가리지 못하겠다지만 나는 빌라 아드리아나가 훨씬 더 좋았다. 날씨 좋은 날에 도시락 싸들고 와서 정원에 앉아 천천히 거닐고 싶은 곳.

아침부터 해 떨어질 때까지 위대한 로마의 빌라 두 개를 본 충만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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