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오면 제일 무서운 건 뭘까.
방심할 때면 잊지 않고 어디선가 나타나는 도둑들이다.
평화로운 외곽 도시, 피우지에 살다 보면 이 나라가 도둑들의 천국이라는 걸 잊게 된다. 그러다가 로마의 테르미니 역에만 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역 구내방송에서는 계속 '소매치기 조심하세요, 소지품 주의하세요'를 외쳐댄다. 이탈리아 전국에 있는 열차표 자판기에서 표를 사려면 맨 처음 나오는 멘트가 '소매치가를 조심하세요'다. 로마에 오면 온몸을 긴장 상태로 태세 전환을 해야 하는데 평화로운 피우지가 고향 같다 보니 로마도 내가 사는 곳 같아 자꾸 마음이 느슨해진다.
이탈리아에 온 지 5주 차. 벌써 몇 번을 당했던가.
피렌체로 향하는 고속철에서는 정말 식겁했다.
피렌체에서 하루 자고 오는 일정이라 기차에 오르자마자 J의 큰 배낭과 나의 작은 배낭, J의 카메라 가방 2개를 우리 자리 바로 위 선반에 올렸다.
"화장실 다녀올게. 가방 잘 봐."라고 말하며 J는 사라졌다.
열차 출발을 기다리면서 창밖을 무심히 보고 앉아있는데 선반 위에 함께 놓아둔 J의 점퍼가 갑자기 툭 떨어졌다. 방금 기차에 오른 이탈리아 청년이 자기 배낭을 선반에 올리다가 우리 짐을 건드려 점퍼가 떨어진 모양이다. 그러려니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점퍼를 챙겼다.
조금 있다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J가 묻는다.
"내 배낭 어디 갔어?"
"뭐라고?"
J의 큰 배낭이 없어졌다!
우리 배낭이 있던 자리에 비슷한 색상의 배낭이 하나 놓여 있다.
아까 이탈리아 청년이 자기 가방을 선반에 올리는 척하면서 슬쩍 바꿔치기를 했나 보다.
청년이 두고 간 가방을 열어보니 속이 비어 있다!
'헐, 이를 어쩌지?'
출발하려는 기차에서 급하게 내려 사방을 둘러보지만 사람도 가방도 보일 리가 없다.
"가방 안 보고 뭐 하고 있었어? 내가 가방 잘 보라고 했잖아.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었던 거야!"
할 말이 없다.
'그러게 왜 선반 위에 짐을 올리냐고. 올릴 때 좀 찜찜하더라. 그냥 무릎 위에 놔뒀으면 이럴 일 없잖아.'라는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아! 내가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방심하고 있었다. 가방에는 뭐가 있지?’
1박에 필요한 옷가지, 세면도구는 그렇다 쳐도 스마트폰, 카메라용 충전기, 카메라 배터리와 메모리 일체가 거기 있단다.
"충전기가 없으면 카메라도 못 쓰는 거잖아. 새로 살 수는 있나?" 한숨을 쉬며 J에게 물었다.
"라이카 카메라 충전기를 아무 데서나 살 수 있겠어?"
이탈리아 생활 중 처음 나선 장거리 여행의 시작부터 이게 뭐람. 여행 초입부터 완전히 망했다. 내 가슴을 치고 싶다.
"내 탓이요"
그런다고 가방이 올 것도 아니다.
분한 마음으로 씩씩거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검은 배낭을 들고 온다.
'앗! 우리 배낭!'
남자는 우리에게 배낭을 건네주며 선반 위에 있는 자기의 배낭을 가리킨다.
'와, 배낭이 바뀐 거야? 도로 바꾸러 온 거야?'
'다행이다! 이탈리아라고 도둑만 있는 건 아니네. 역시 이탈로 기차가 고급이라 달라'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청년이 가고 난 후 배낭 안에 넣어둔 충전기를 확인해 보니 속가방이 열려 있다. 아무래도 가방을 열어보고서 가방도 싸구려(J가 내 허락도 없이 테무에서 산 것), 안에 들어있는 것도 돈 되는 거라곤 하나도 없으니 도로 돌려준 것 같다. 아까 자기 배낭이라며 가져간 건 완전 허깨비 빈 가방이었거든. 우리 가방은 아주 묵직한데 헷갈릴 수는 없는 거다. 다시 다른 사람 배낭하고 바꿔치기하기엔 우리 배낭이 쓸데없이 무거워서 도로 가져온 것 같다.
걔한테는 쓸모없는 것뿐이었겠지만 우리에겐 꼭 필요한 것들이었으니 귀찮다고 아무 데나 던져버리지 않고 갖다 준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에 청년을 다시 만나면 음료수라도 하나 건네주고 싶다.
작년 북유럽 여행 중에 만났던 ‘친절한 소매치기’가 생각난다. 관광객으로 북적북적한 코펜하겐 인어공주상 앞에서 내 지갑을 슬쩍했던 소매치기는 지갑에서 유로 현금만 재빨리 빼고 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을 내 앞에 툭 던져줬었다. 그 소매치기에 이어 두 번째로 고마운 도둑이다.
열차 선반의 배낭 옆에는 카메라 가방이 있었다. 만일 카메라 가방을 들고 갔으면 어쩔 뻔했나. 정말 다행이다. 조금 느슨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준 해프닝.
사실 피우지로 가는 첫날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테르미니역에서 J는 캐리어 네 개를 지키고, 나는 작은 배낭을 멘 채 피우지 행 버스표를 사러 갔다. 계산을 하려는데 직원이 내 배낭을 가리키며 '니 가방 열렸어' 하는 시늉을 한다. 배낭을 앞으로 돌려보니 가방이 절반 가량 열려있었다. 안에 들은 게 간식거리 등 허접한 것뿐이라 지퍼를 도로 닫고 말았지만 오싹한 순간이었다. 등에 멘 배낭은 언제든지 손을 탈 수 있다는, 유럽 대도시에서의 기본적인 철칙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우리 조심하자"를 다짐했건만 열차 여행 초입에 부주의했던 거다.
세 번째 소매치기는 피사의 사탑 입구에서 만났다. 입구의 노점들을 지나다가 누군가 배낭을 건드리는 느낌이 있어 뒤를 돌아봤다. 청소년 나이의 여자애가 내 배낭을 잡다가 갑자기 몸을 싹 돌리며 옆의 가게 물건을 보는 시늉을 한다.
"뭐 하는 거야!"
내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건을 만지며 딴청을 피운다. 배낭을 앞쪽으로 돌려보니 안쪽의 지퍼까지 이미 열려 있다. 가방 안에 오죽 가져갈 게 없으면 그 지퍼까지 열었겠냐만 '배낭에는 반드시 잡동사니만을 넣고 다니자'라는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한 번은 테르미니 역에 도착한 지하철에서 내리려는데 이상하게 몸을 밀치며 끼어드는 여자애가 있었다. 낌새가 수상해 우리 둘이 째려보자 급하게 사라졌는데 J의 카메라 가방이 벌써 반쯤 열려 있었다.
역시 지하철에서 어깨에 멘 가방 위에 헐렁한 옷을 얹고 그 속에 손을 감춘 채 J에게 바싹 붙어 서서 점퍼 주머니 속 휴대폰을 빼가려다 들킨 도둑놈도 있었다.
뭔가 이상하게 접촉하거나 밀치는 사람은 경계하고 확인하기, 지갑은 무조건 바지 주머니 깊숙이 보관. 작은 손가방도 믿을 수 없다. 이탈리아에 와서 기본이 돼버린 습관이다.
여러 차례 이탈리아의 소매치기를 겪으면서도 J는 ‘옛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며 천하태평이다. J가 이탈리아를 처음 여행했던 수십 년 전에는 관광지 어디를 가나 집시들이 많았고 그들이 기상천외의 방법으로 소매치기를 해댔다는 것이다.
지난봄, 뉴욕에 사는 사촌들이 한국 여행을 왔었다. 아이까지 스무 명이나 되는 대부대와 일주일간 함께 전국을 다녔다. 그 일주일 동안 일행들은 휴대폰을 세 번 잃어버렸다가 모두 되찾았다. 뉴욕에 돌아가서 한국을 그리워하며 보낸 메시지의 첫 번째가 '세 번 잃었다 세 번 다시 찾은 휴대폰'에 관한 얘기였다. 뉴욕 거리에서 휴대폰을 분실했다가 다시 찾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세계 으뜸의 치안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지금은 비록 제정신이 아닌 탄핵 대통령 덕분에 여행 위험 국가로 분류되어 있지만 우리나라가 대단하다는 건 해외에 나와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