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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외국에서 여행자보험 들기

by Bora

성탄절 아침에 팔꿈치 골절이라니.

그것도 이탈리아에서.

비록 예상치 못한 사고로 불편한 점도 많았고 고생도 했지만 생각할수록 감사할 따름이다.


계단 바로 앞에서 미끄러졌는데, 만약 계단 아래로 굴러 머리가 부딪쳤다면?

팔꿈치가 아니고 다리가 부러졌다면?

보험한도가 기본형인 천만 원 짜리였다면?

지금이 아니고 이탈리아 살기 끝 무렵이나 튀니지, 북유럽에서 계속 이동해야 할 때 사고가 났다면?

하다못해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 부러진 것도 감사할 일이다. 무엇보다 다리가 무사하니 나머지 여행에 불편은 있어도 큰 무리는 없다.


크리스마스 날 사고 이후 로마 병원에서 1차 처치로 깁스,

다음 날 입원 후 수술, 하루 뒤 퇴원.

이렇게 하는데만 11,000유로 들었다. 한화로 1,700만원 정도.(유럽 사설병원 의료비는 정말 정말 비싸다)

내가 든 보험의 사고 보상 한도는 2천만 원. 조금 넉넉하게 든 게 얼마나 다행인지.


카드사에서 실 결제금액 영수증이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1월 2일에 보험료 청구 서류를 보냈다.

이번 여행자 보험은 트래블로버라는 보험 중개 사이트를 통하여 들었다. 트래블로버 보험은 가입할 때의 조건에 따라 보험사가 정해진다. 이번에는 하나손해보험이다.


사고가 나면 접수도 트래블로버에서 대행해 준다.

1월 2일 트래블로버 접수 후

나흘이 지난 1월 6일에야 서류가 하나손해보험으로 넘어갔다.

이때부터는 보험사와 연락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틀 지나 1월 8일에 보험사에서 서류가 정식으로 접수됐다는 문자가 왔다.

보험금 지급이 확정된 건 그로부터 열흘 후였다. 확정과 동시에 계좌로 입금됐다.

사용 금액은 다 인정됐지만 신용카드 청구액대로 주는 게 아니라 그날의 환율을 계산하여 돌려준다. 결국 차액 몇십만 원은 내가 내는 셈이다.


해외 여행을 다닌 지난 30여 년 동안 수도 없이 여행자보험을 들다가 사고로 보험금을 받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골절수술로 인해 보장 한도를 꽉 채워 보장액이 거의 남지 않았으니 남은 여행이 걱정된다. 우리는 이탈리아 살기 6주에 이어 아프리카 튀니지, 북유럽 오로라 렌터카 여행까지 총 10주가 넘는 여정 중 이제 고작 절반이 지난 상황이다.


보험을 추가로 들어야 하나?

인터넷에서 '해외 체류 중 여행자보험 가입'을 검색해 본다.

한국 여행자보험은 '국내에서 가입 후' 출국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체류 기간이 4개월을 넘는 경우에만 외국에서 가입할 수 있고, 그보다 여행 기간이 짧으면 해외 가입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


그렇다면 외국 보험이라도 들어야지.

2022년 코로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세계일주를 떠나면서 외국 보험사의 여행자 보험에 들었던 적이 있다. 스페인계 헤이문도라는 회사의 여행자 보험이 코로나로 인한 한국 귀국까지 보장해 준다고 하여 그때 보험료만 30만 원 넘게 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자보험이란 보험금 타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게 최고다.


팔이 부러져 병원에 가는 날 아침에 마침 네이버 뉴스에서 노르웨이 버스 추락 사고 소식을 접했다. 오로라 투어 버스가 로포텐 제도의 눈길에서 호수로 떨어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내용이었다. 로포텐 제도는 우리가 오로라 관찰을 위해 가보려고 점찍어둔 노르웨이의 포인트다.


아이고 무서워. 겨울의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빙판길을 달려야 한다. 스노타이어를 장착했다고 해결될 일인지 겁부터 난다.


"아무래도 새로 보험 가입을 해야겠어. 보장을 다 써버렸는데 앞으로 여행 기간이 한참 남았으니 불안해서 안 되겠어."

다시 여행자보험을 들려고 보니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국내 보험사의 해외여행자보험은 출국 후에는 가입할 수 없다.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작년에 두 번째 세계일주를 하면서 뉴질랜드에서 첫 여정을 시작했었는데 뉴질랜드에서 인천을 경유하면서 하룻밤 우리 집에서 잔 후 유럽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여행자보험은 당연히 뉴질랜드로 출국하는 날부터 시작해서 유럽과 남미, 알래스카를 넘어 다시 한국까지 돌아오는 총 두 달의 기간으로 들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험 관련 내용을 찾아보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이전에 가입한 여행자보험은 출국할 때마다 가입을 해야 하며, 국내에서의 재출국 시에도 새로 가입해야 합니다. 출국 전에 가입한 여행자보험은 입국 후 보장을 받을 수 없으므로 해지 후 새로 가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뉴질랜드에서 한국에 들어와 하루 지낸 후 유럽으로 가게 되면 '입국 후 재출국'이 되므로 입국 순간부터 보험은 무효화됐던 것이다. 그런 내용을 모르고 유럽과 남미, 남극, 알래스카를 보험도 없이! 다녔다! 알래스카의 빙판 길에서 만약 사고가 났다면, 보험료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다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출국 후 여행자보험'이란 상품이 있다길래 검색해 봤다. 광고, 스폰서로 뜨는 보험들을 찾아 리뷰를 보니 보험금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비관적인 리뷰만 보인다. 아 끔찍해.


헤이문도는 해외보험이니 어떨까 생각하고 계속 메일로 오던 헤이문도 광고를 클릭하여 보험 가입을 진행해 봤다. 그런데 국적 표시 리스트에 아예 한국이 없다. 알고 보니 코로나 때 한국인들이 하도 보험금을 알뜰하게 받아내서 그뒤부터 한국인과는 아예 보험 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단다.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서 그나마 좀 멀쩡해 보이는 보험 세 개를 간신히 찾았다.

1. 미국을 기반으로 하는 노마드 보험.

2. 산악 활동 등 위험한 여행도 받아준다는 세이프티 윙

3. 장기 해외 여행자를 위한 프로트립 여행자보험.


J는 세이프티 윙을 추천한다.

그래 이걸로 하자. 본인 부담금 250달러 조건을 적용하면 25,000달러까지 보장된단다.

우리 둘 다 다시 들까? 나만 들까?

일단 나만 알아보기로 했다.


약 7주간의 보험료를 계산하니 헉, 337불! 미친 환율에 거의 50만 원 돈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탈리아에서는 보험 없이 그냥 조심조심 다니자. 튀니지와 북유럽 여행 기간만 한 달 안쪽으로 넣어도 210불, 30만 원이 넘는다. 한국 보험은 5만 원이면 2천만 원 보장인데.


해외교육문화원에서 추천하는 프로트립월드를 알아볼까?

이 보험은 한 달 단위로 가입해야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보험 없이 조심하기로 하고 튀니지부터 한 달을 넣어봤다. 그나마 이게 가장 저렴하다. 총 175유로.

마음 편한 게 최고지. 생돈이 또 나가는 셈이지만 들어놓으니 조금 안심이 된다.


역시 보험은 보상받을 일이 생기지 않는 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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