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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탈리아를 떠나며

by Bora

알로라(Allora).

이탈리아에 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다. '글쎄, 그렇다면, 그럼'이라는 뜻이란다. 우리말로 '음...'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문장의 앞, 뒤, 중간에 이 단어를 수도 없이 썼다.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알로라'라는 발음을 따라서 할 때마다 혀에 감기는 느낌이 달콤했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발음을 들으면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막연히 길다고만 생각했던 '이탈리아 살아보기' 일정 6주가 꿈결같이 지나가고 어느새 떠날 시간이 되었다. 매일 저녁 우리를 반겨주던 거리의 크리스마스 조명, 광장의 귀여운 곰돌이 장식도 며칠새 다 사라져 버렸다.


길고 긴 공사가 이어지던 테르미니역 앞 500 광장의 버스터미널도 말끔하게 새 단장을 했다.


떠나기 전 J는 집 앞 미용실에 가서 6주간 자란 머리를 잘랐다. 고풍스러운 미용실 의자에 앉아 길어진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J의 모습을 보며 40일이 넘는 날짜를 실감한다.


그동안 2개월 넘는 여행을 여러 번 해봤지만 한 곳에서 눌러앉아 살아보는 것과 여행하는 것은 많이 달랐다.

정주민과 유목민의 차이랄까. 정주민이라기엔 얼치기에 가까웠지만 매일 저녁 편하게 머물 공간이 하나 정해져 있다는 건 무척이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이탈리아에 오면 아는 사람도 생기고 그들과 교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했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 때문에라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실시간 채팅앱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용건을 전달할 수 있을진 몰라도 일상적인 대화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매일 아침 카페-바에 들른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크라상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옆사람과 담소를 나눈 후 제 갈길로 가 버린다. 우리도 매일 아침 그들과 섞여 크라상과 함께 카푸치노를 마셨지만 그저 관찰자일 뿐 그들 사이에 낄 자리는 없었다.

떠나는 날 카페에 들러 인사를 했다. 루치아노가 선물이라며 예쁜 초를 하나 들고 왔다. 가져갈 자리가 없어 그 자리에서 초를 붙여 기념촬영.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그라치에, 차오. (땡큐, 굿바이)


그동안의 여행이 말을 탄 몽골의 유목민처럼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이었다면, '살아보기'란 근거지를 둔 채 편안하게 나들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절반짜리 주민이었어도 내가 사는 곳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고 쾌적하게 꾸미려는 마음가짐이 절로 솟아났다.


피우지에 살아보니 일단 눈이 즐거웠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멋있는 거야!

장바구니 끄는 할머니도 긴 코트에 부츠를 갖춰 신고, 집 앞 담배가게에 담배 사러 가는 할아버지조차도 모직 바지에 깔끔한 외투 차림이다. 패딩 코트 입은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가 어렵고, 대부분 기다란 멋쟁이 모직 코트 장착이다.


나는 아무래도 남자들 패션이 눈에 들어오는 편인데, 남자들의 바지가 하나같이 핏이 살아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6주 동안 아재 바지 차림 남자는 단! 한 명도 못 봤고, 대부분 남성들의 바지는 아랫단이 좁아서 날렵해 보인다.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J의 바지를 다시 훑어봐도 그 태가 나오는 것 같지 않다. 이탈리아인의 패션 감각은 그들의 유전자에 장착돼 있는 건가?

다음에 다시 이탈리아에 와서 살게 된다면 옷은 가져오지 않고 여기서 사 입어도 좋을 것 같다. 적당한 가격으로 눈에 들어오는 옷이 많았다.

집들도 가게들도 사람들도 멋져서 정말 눈이 호강했다.


피우지의 일상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지만 사실은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모든 것이 갖춰진 집을 떠나,

편리한 로봇 청소기 대신 덜덜거리는 유선 청소기, 대형 와이드 TV 대신 태블릿 화면,

소리 좋은 보스 스피커 대신 자꾸 끊어지는 태블릿 오디오, 제대로 된 예쁘고 용도에 맞는 식기 대신 오로지 한 가지 납작한 접시에 코팅 벗겨진 프라이팬을 써야 했고,

편안한 안락의자도, 따끈따끈한 방도,

편리한 갖가지 조리도구도 없다.

생각이 떠오를 때 한밤중이라도 주문을 넣어두면 새벽에 어김없이 대문 앞에 도착하는 오아시스, 컬리의 새벽 배송 따위는 꿈도 못 꾼다.


결핍이 많은 곳에서 옹색하게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살다가 문득 신혼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도 그랬었다. 부족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들이며 딱 이만한 좁은 집에서 살던 젊은 나날.

그래도 희망이 샘솟던 시절이었다.

이제 젊음은 가고 없지만 새로운 환경이, 소소한 결핍이 오히려 삶을 알차게 한다는 생각으로 소꿉놀이 하듯 모든 걸 놀이 삼아 즐겼다.


대신 풍요로운 것들은....

무엇보다 야채와 고기가 싸다.

질 좋은 스테이크 반 근에 5유로, 신선한 루꼴라는 큼직한 한 봉지 가격이 단돈 1유로다.

한국에서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최고급 이탈리아 와인, 아마로네와 바롤로도 마음껏 마시고,

풍미 좋은 버펄로 치즈도, 프로슈토도 마음대로,

게다가 갓 절인 올리브의 향긋함은 어쩔 거냐고,

이 모든 게 내가 사랑하는 와인과 찰떡궁합이니 이탈리아를 사랑할 수밖에.


고급 와인에, 좋은 스테이크와 버섯, 아스파라거스, 양파를 볶고

치마 디 라파(무청) 무침에

향긋한 올리브와 신선한 치즈, 프로슈토를 곁들이면 어느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보다 풍요롭다.

이 정도를 풀코스로 먹고 마시려면 100유로 가까이 나오겠지?

매일 돈 버는 느낌으로 와인잔을 부딪쳤다.


안타까웠던 건 팔꿈치 골절 이후 와인을 마음껏 마시지 못했던 거다. 내가 사고 소식을 전하자마자 골절 경험이 있는 한 친구는

"너 와인 마시면 절대 안 돼!"라고 경고를 했다.

"왜? 근거를 대"하며 따져댔지만 검색한 결과 음주는 골절 회복에 좋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조심하게 되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팔 부러진 일보다 그것 때문에 와인을 맘 편하게 마시지 못한 게 더 아쉬웠다.


이탈리아에 오면 맛있는 식당도 다 가봐야지. 했던 마음은 몇 번의 실패 후 포기했다.

구글맵으로 음식점을 검색해 보면 내가 사는 피우지 마을에도 맛집 천지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에서 느낀 건, 음식들이 '너무 짜다'

이탈리아 식당 순례는 소금의 양으로 정리해야 하는 건지 싶었다.


지난가을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테 근처에서 한 달간 살고 돌아온 J의 친구를 출발 전 서울에서 만났었다.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테는 풍광이 너무 좋았지만 제일 힘들었던 게 음식이었다고, 너무 짜고 느끼했단다. 여행도 자주 다니고, 항상 이태리 식당에서 약속을 잡던, 서양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도 오래 비슷한 음식을 계속 먹으면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도 지난 9월에 친구 부부와 세 쌍이 2주간 이태리, 그리스 여행을 했었다. 나만 빼고 와이프들이 이태리 요리도 잘하고 맛집에 관심도 많은 팀이라 일부러 맛집을 많이 찾아다녔었다. 거기서도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면 최고의 칭찬이 "여기 안 짜네. 먹을만하다!"였다.


식당에 지불할 돈으로 차라리 좋은 식재료를 구해서 풍성하게 먹는 게 낫다는 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여행지에 가서는 분위기를 즐기며 마음에 드는 집도 찾아다녔다.


로마 트라스테베레 지역의 백 년 넘은 식당, 피렌체의 소박한 선술집, 나폴리의 120년 전통의 피자집은 이탈리아 아니면 먹을 수 없는 맛집이었다!


6주를 있으면서 절반 정도는 로마 나들이를 했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로마 교외에 숙소를 잡은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오가는 게 여유로우니 시내버스가 파업을 해도 걱정이 없었다. 어디로 가든 유적지가 가까이에 있어 지도를 보고 찾아가기만 하면 됐다.


아피아 가도도 잊을 수가 없다. 수천 년 전 로마시대의 돌길에서 그 시절을 상상해 보는 것은 몇 시간을 걸어도 그저 좋았다.


테베레 강변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포폴로 광장, 포로 로마노의 옆길, 수많은 분수들, 조각들.


수천 년 역사의 향기를 느끼며 지나간 모든 길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이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피우지에서 아침에 풍성한 샐러드를, 저녁에 향긋한 와인과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우리는 말하곤 했다.

"서울 가면 여기 생각 많이 나겠지?"라고.

다시 오고 싶은 곳. 다시 와서 살고 싶은 곳.

그러나 앞 일을 누가 알겠는가.

모든 것은 그저 흐르는 대로.


알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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