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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골절 수술에 1,700만원

by Bora

가벼운 사고에도 이렇게 일상이 흔들리는데 제주항공 사고를 보면 나 자신이 한가롭게 느껴진다. 사고 당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이탈리아까지 와서 수술이라니!

대단한 수술은 아니라서 크게 걱정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다음날 수술 때문에 자정부터는 금식이다. 실비아 박사가 오늘부터 수술 후 깁스 풀 때까지 무조건 금주라고 했건만 저녁 먹을 때 J는 테이블 위에 와인을 두 잔 따라놨다. 비록 내 잔엔 밑바닥에 깔리게 고작 3밀리 정도지만.


"뭐야, 수술받을 사람한테 술 마시라고? 혼자 드셔!"

“그래. 산 사람이라도 계속 살아야지, 둘 다 참을 필요는 없지”

불안한 수술을 앞두고 건배라도 하면서 힘을 내자는 마음은 알겠는데, 어쨌든 생각 없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깁스에 낙서가 빠지면 섭섭하지!”

J가 메모용으로 가져온 네임펜을 찾아서 깁스에 그림을 그려댄다.

Buon Natale, 메리 크리스마스? 혼자 메리 하시는군. 약이 오르지만 낙서한 것들을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였다는 사실이 서글프면서도 웃음도 난다.


내 평생 깁스라곤 처음이다.

뭐든지 새로운 것에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성격이라 깁스도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했지만 하룻밤만으로도 무척이나 힘들다. 속의 피부가 간질간질한데 긁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석고가 거의 돌덩어리라 무게가 2킬로는 넘는 것 같다. 아직까지 크게 힘들지는 않지만 무거운 돌덩어리를 목에 걸고 다니면 나중에 목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다. 내일 수술 후에는 석고 말고 플라스틱 종류 보호기를 해준다고 했는데 그건 좀 나으려나? 주변에서 오래 깁스를 하고 생활했던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밤새 무거운 팔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뒤척였다.


아침까지 이메일로 수술비 견적서를 보내주겠다던 병원에선 소식이 없다.

어제 하루 처치한 의료비를 보니 이 병원 수술비가 장난이 아닐 것 같다.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그동안 들던 보험보다 조금 높은 보험료를 내서 해외 상해의료비 보장이 2000만 원까지인데 수술비가 1만 유로를 넘는다면 불안해진다.

제정신이 아닌 대통령에 이어 대행 국무총리까지 탄핵 심판을 방해하고 나서면서 환율은 천정부지다. 유로 환율도 1유로당 거의 100원은 더 오른 것 같다.


삼십여 년간 해외에 나갈 때마다 여행자 보험을 들기만 하고 보상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하필이면 처음으로 써먹으려니 보험 한도가 초과되게 생겼다.


J에게 "나, 1만 유로 넘으면 수술은 다른 병원 찾아서 할래"라고 미리 선포했다.

로마로 떠나는 버스 시간이 다가와서 병원의 견적서 받기를 포기하고 집을 나서려고 하는 차에 견적서를 담은 메일이 왔다.


"뭐? 11,000유로!"

어제 낸 진료비까지 합쳐서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1,900만 원이 넘는다. 차후 치료비를 감안하면 2천만 원을 훌쩍 넘게 생겼다.

보험 한도를 초과하는 것도 문제지만 팔꿈치 골절 수술하는데 2천만 원이라니. 아무리 보험회사에서 처리해 준다고 해도 그런 터무니없는 가격 자체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차라리 동네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갈까 봐. 어제 마르코가 찾아서 알려준 국립병원은 24시간 진료라잖아. 수술 좀 늦어지면 어때"

로마행 버스에 올라 보다 합리적인 가격의 다른 병원을 찾아보자고 J에게 말했다.


J는 마르코가 알려준 국립병원은 교통이 나빠서 불가능하다고 아예 제껴버린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와츠앱으로 메신저를 주고받기도 하더니 오늘 당장 수술 스케줄을 잡을 수 있는 병원은 없다고 난감해한다.

개인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영어 소통까지 된다는 정형외과 의사와 연락이 되어 그 사람한테 수술받으면 딱 맞겠는데, 그 의사는 지금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서 사흘 후에나 로마에 돌아온다고 한다.

일단 우리가 처음 갔던 병원에 진료비를 깎아달라는 메일을 보내보기로 했다.

의료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에서도 협상을 통해 병원비를 깎는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아서 그 방법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보내준 견적 잘 받았다. 내 여행자 보험의 한도는 총 10,000유로다. 어제 치료비와 차후 치료비를 포함해서 1만 유로 이내여야 하는데 거기에 맞춰 진료비를 줄일 수 있을까? 꼭 1인실에 입원하지 않아도 되니 총 1만 유로에 맞출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바란다. 그게 안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메일을 보냈다. 답이 없다.


나는 "안 깎아주겠다고 하면 그 돈 내고 여기서 수술할 순 없어. 며칠 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병원을 찾아갈래. 차라리 비행기 타고 서울 가서 수술받고 오는 게 더 싸겠네!"라고 씩씩거렸다.

"빨리 수술부터 받아야지 자꾸 시간을 끌면 어떡해. 일단 현재 비용까지는 커버가 되니까 그냥 수술받자. 진료비 깎는 건 내가 병원에 가서 최대한 해 볼게."

이렇게 한참을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 일단 병원에 가서 상황을 보기로 했다.

로마로 가는 중에 병원에서 다음과 같은 메일이 왔다.


존경하는 고객님께,

저희는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의료 팀과 대화를 진행한 후 새로 작성한 견적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어떠한 설명이 필요하신 경우에도 저희는 항상 대기하고 있습니다. 안부를 전합니다.

파이데이아 병원 재무팀 안드레아


‘휴 다행이다. 어느 정도는 깎을 수 있겠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지루한 기다림과 함께 (다른 병원으로 가겠다는) 위협과 협상 끝에 (겨우!) 1,500유로를 깎았다. 이 병원은 환자가 견적을 수용하고 나면 50% 선결제를 해야 비로소 치료가 시작되는 시스템이다. X레이 추가 비용 150유로와 메디컬 리포트 비용 70유로는 별도로 지불해야 했다.


드디어 진료가 시작됐다. 혈액 검사를 하고 다시 X레이를 찍은 후 병실로 안내됐다.


이 병원 입원실은 모두 1인실이라는데 그중에서 내가 입원한 병실이 제일 크고 좋은 방이란다. 비어 있는 입원실이 딱 하나 남았다며.


거실에, 안마 의자에, 널찍한 소파 베드까지 갖춰져 있고 가구와 조명 등 내부 인테리어도 럭셔리하다. 이 방의 하루 입원비는 660유로, 백만 원짜리 특실에서 호강하게 생겼다.


테라스에 나가면 건물 뒤 공원이 내려다보인다.

아프지만 않다면 호텔로 생각하고 테라스에 앉아 커피라도 마시면 좋겠고만...


멋진 조명의 욕실에는 별도의 어메니티도 있다. 사실 나는 이렇게 호사스러운 특실은 원치도 않고, 이탈리아 병원의 다인실에서 다른 환자들과 부대껴보고 싶은데... 맘대로 되는 게 없다.


유럽의 병원에선 보호자가 입원실에서 잘 수가 있는 걸까?

'J가 저 소파베드에서 자면 되겠다.' 싶어서 간호사에게 "보호자도 병실에서 잘 수 있니?"라고 물으니

"잘 수 있어. 90유로 추가 요금만 내면 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헉. 완전히 호텔이군’. 바가지 천국 병원이다.


나에게 깁스를 해준 실비아 박사가 다른 젊은 의사와 함께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나타났다. 어제는 청바지 차림에다 손에 예쁜 반지들도 끼고 있었는데 오늘은 싹 다 빼버리고 완전한 의사의 모습이다.

내 수술은 앞으로 두 시간 후인 4시에 시작한다고 한다. 이 병원의 정형외과 과장인 마티아 파브리 박사가 수술을 집도하며, 자신과 후배 의사는 옆에서 보조로 참가한다고. J가 재빨리 집도의사 이름을 구글 검색하더니 “논문도 많이 쓴 정형외과 전문의네. 믿을만하다"라고 말해준다. 자기가 뭘 안다고!


4시가 되어도 수술을 시작한다는 연락이 없다.

다리는 멀쩡하니까 입원실 밖의 복도를 어슬렁거려 봤다.

간호사 스테이션 앞에 있는 하얀색 크리스마스트리가 예쁘다.


약속 시간을 한 시간 넘기고서야 수술용 침대가 입원실로 들어와 날 싣고 지하의 수술실로 내려갔다. 수술은 부분마취로 진행되지만 수면을 시키기 때문에 수술실에서 의사 얼굴 보고 인사한 후 주삿바늘이 꽂히며 의식은 사라졌다. 나중에 끝나고 보니 한 시간이면 될 줄 알았던 수술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단다.


가끔 뉴스 같은 걸 보면 가벼운 수술인 줄 알고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의식 잃고 영영 못 일어나는 사연이 가끔 나오지 않나. 원래 당사자보다 기다리는 사람이 더 힘든 법.

그 사이 J는 불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단다. 게다가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겼으니. 이래서 차라리 보호자보단 환자가 마음은 편하다.

내가 마취에서 깨는 동안 수술을 마친 담당 의사 둘이 입원실에 찾아가서 '수술 잘 됐다'라고 J에게 알려줄 때까지 오히려 그가 더 초주검이 된 것도 같다.


마취가 깨면서 비몽사몽간에 병실로 옮겨졌다. J는 집도의로부터 수술 후 촬영한 X레이 사진을 받아봤는데 금속제 와이어 두 줄을 박았단다. 이게 우리나라에서 통상 얘기하는 ‘철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링거를 통해 진통제가 계속 투여되고 있는 상태에서 왼팔을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조금만 자극이 오거나 움직이려고 하면 아프다. 하긴 맨살을 자르고 뼈를 헤집어 철심을 박아놨으니 안 아픈 게 이상한 거지. 가만히만 있으면 통증은 있다고 해도 견딜 만하다.


(여기가 이 나라의 병원을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이탈리아 병원은 수술 후 처치가 참 심플하다. 수술이 끝난 환자에게 작은 링거 하나와 진통제가 전부다. 밤에는 그것마저 빼준다. 우리나라 병원에선 밤새 여러 사람이 들락날락하면서 불을 켜고, 체온 재고, 주사 놓고 하는데 여긴 간호사가 와서 주사 바늘을 제거하면서 굿나잇 하고 사라지더니 아침까지 아예 나타나지를 않았다. 어떤 시스템이 더 좋은 것일까? J 말에 의하면 밤새 간호사가 몇 번 살그머니 들어와 플래시를 켜서 팔의 붓기를 확인하고 혈압을 재는 등 내 상태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병원에서는 입원 환자들에게 어떤 음식을 제공할까?

이태리식? 여긴 이탈리아니까 당연히 이태리식이겠지.

24시간 넘게 쫄쫄 굶었으니 아침 식사에 대한 기대가 컸었는데 방으로 가져다준 식사 쟁반을 보고 완전 실망!

크루아상 하나와 차 한 잔. 너무한 거 아냐?


아침을 먹고 나자 침대 시트를 새 걸로 갈아주겠다며 직원이 나타났다. 11시 체크아웃이라면서 뭘 이렇게까지. 특급호텔 맞네.


10시에 수술을 집도했던 파브리 박사가 입원실로 들어섰다.

"통증은? 기분은? 손가락을 움직여보세요. 굿! 손목도 돌려보세요. 굿! 팔꿈치를 살살 접어 보세요. 아니, 아니. 그렇게 어깨까지 함께 돌리지 말고 팔꿈치만 조금씩 접어보세요. 그렇죠. 통증이 오면 중단하고 괜찮으면 계속 그렇게 팔 운동을 해야 해요. 열심히 운동하고 다음 주에 봅시다."


이번에는 전체 깁스가 아니고 수술 부위를 빼곤 거즈로 두툼하게 감은 소프트 처치다. 깁스보다 훨씬 편해서 옷도 갈아입을 수 있다.


천문학적인 병원비만 남았지만 수 십 년 동안 내가 지불했던 여행보험료를 생각하며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팔꿈치 수술에 1,700만 원이라니, 우리나라가 정말 좋은 나라다.

그런데 보험료는 잘 받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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