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에 팔꿈치가 탈구됐다.
크리스마스 날, 내 생애 언제 구경하나 싶어 바티칸의 성탄절 정오 미사에 가보기로 했다.
새벽 6시 반 로마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나 먼저 내려갈게"
J가 열쇠로 현관을 잠그는 동안 먼저 출발해서 대리석 복도를 걸어 계단으로 돌려는 순간 발이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몸이 통제력을 잃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먼저 팔꿈치가 깔리고 얼굴까지 바닥에 부딪혔다.
몸을 꼼짝 할 수가 없다.
자빠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 달려온 J가 개구리처럼 납작 바닥에 엎어진 나를 부축해서 일으킨다.
"괜찮아? 여기 바닥에 물기가 있잖아. 못 봤어?"
“못 봤으니 미끄러진 거지. 봤다면 이렇게 미끄러졌겠어?” 애꿎은 J에게 화풀이를 했다.
일어나서 얼얼한 얼굴을 만져보니 딱히 아픈 데는 없다. 다리도 욱신거리긴 하지만 괜찮은 것 같다. 팔이 많이 아픈데... 상처가 났나?
일단 버스를 놓치면 안 되니 절뚝거리며 터미널로 향했다.
"이런 몸으로 가도 되겠어?" J가 부축하며 걱정을 한다.
안 좋으면 더더욱 로마로 나가야지. 병원도 없는 여기서 뭘 하겠어?
터미널에 도착해서 점퍼를 벗었다. 스웨터를 올리자 팔꿈치가 퉁퉁 부어올랐다. 살살 만져보면 속에서 덩어리 같은 게 움직이는 것 같다. 성한 오른쪽 팔꿈치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다행스러운 건 가만히 있으면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세 명 중 하나에게 물어봤다.
"혹시 로마로 가니? 로마 가는 버스 6시 반 출발 아냐?"
자기도 그런 줄 알고 왔는데 크리스마스라서 배차 시간이 달라지거나 아예 운행이 취소된 것 같단다. 성탄절 시간표는 별도로 있는 건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다시 팔꿈치를 살펴봤다. 팔꿈치 한쪽이 심하게 튀어나와 있고 그 위쪽도 제법 부어있다.
급 검색을 한 J가 "아무래도 팔꿈치가 탈구되면서 인대가 손상된 것 같아"라는 진단을 제시했다.
나도 검색을 시작했다.
인터넷에 전문가들이 쓰는 말은 왜 이렇게 이해하기가 힘들까?
뭔 소리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일단 누워보자.
누우니까 한결 편하다.
'팔꿈치를 구부리고 손바닥이 위로 오도록 아래팔을 부드럽게 회전?'
다시 한번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다.
"안 되겠어. 오늘은 집에서 쉬고 내일 로마의 병원에 가서 X레이 찍고 확인해 봐야겠다."
J의 말이 맞다. 아주 분초를 다투는 위급 상황은 아니다. 오늘 병원에 간다 해도 성탄절이라 병원에는 당직의사만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 혹시 몰라 로마와 피우지의 병원을 검색해 뒀었다.
피우지에는 병원이 아예 없고, 로마의 공공병원은 외국인 진료비가 무료인 대신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한다는 등 평이 아주 나빴다.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로마 외곽의 평점 높은 사립 인터내셔널 종합병원을 저장해 뒀었다.
파이데이아 국제 병원 (Paideia International Hospital)은 공공이 아닌 사립병원이다.
구글맵에 테르미니역에서부터 병원까지의 대중교통을 찾아봤다. 버스가 한 번에 병원까지 간다. 1시간 가까이 걸리고 배차 시간이 30분 이상이지만 나쁘지 않다.
그사이 J는 로마의 탈구 전문 병원을 열심히 찾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다.
가만히 기다리는 걸 못하는 J는 오전 중에 로마에 나갈 수 있는지 다시 터미널에 가보겠단다. 내일 가자더니 병원에 가봐야 사람도 없는데 로마 가서 어쩌려는지. 로마행 버스를 타도 피우지로 돌아오는 차가 없으면 문제다.
"그러지 말고 아래층 보니파시오 카페에 가서 인근에 병원이 있는지 물어보자."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피우지 시내에서 보니파시오 카페만 유일하게 문을 열고 직원 셋이 일하고 있다. 한바탕 아침 손님들이 왔다 간 듯하다.
우리를 본 마르코와 엘리자베타가 환하게 웃으며 입을 모아 "부온 나탈레(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다.
AI통역기를 열어 J가 사정을 설명했다.
"와이프가 대리석 바닥에 넘어져서 팔을 다쳤는데 근처에 병원이 있나? 혹시 오늘 로마 가는 버스 시간이 바뀐 거니?
활짝 웃던 마르코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로마 가는 버스는 성탄절이라 잘 모르겠어. 피우지 역 뒤에 24시간 의료서비스가 있어. 좀 알아볼게" 하고는 어디론가 통화하기 바쁘다.
옆에 있던 엘리자베타에게 통역기를 댔다. 얘는 통역기는 싫단다. 번역기에 직접 문장을 쳐서 입력하는 방식만 고집한다.
"지금 마르코가 우리 동네의 응급 의료 서비스에 전화하고 있는 중. 피우지에는 병원이 없고 여기서 차로 20분 거리의 알라트리에 마을에만 병원이 있어"
"우리는 차가 없으니 대중교통만 가능한 걸. 그 마을로 가는 버스가 없잖아. 그냥 내일 로마의 병원으로 갈게."
J가 괜찮다고, 그렇게 급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마르코와 엘리자베타는 응급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보건소는 문을 닫았나 보다.
이번에는 앰뷸런스를 부르겠단다.
“118에 전화할게. 구급차가 바로 올 거야”
일이 점점 커지는 걸 예감한 J가 손사래를 친다.
"괜찮아. 괜찮아. 이 마누라 죽으면 새 마누라 구하면 돼. “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하곤 우리는 방으로 되돌아왔다.
코로나 때 마을 전체가 봉쇄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던 이탈리아에 대한 뉴스를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는 지역 의료서비스가 꽤 자리를 잡았나 보다. 병원은 없어도 지역 의료체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코로나 때 오히려 굳건했던 우리나라 의료가 요즘은 '응급실 뺑뺑이' 뉴스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신세가 됐으니 세상 일이란 참 새옹지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