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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Dec 23. 2021

차와 사람을 살리는 자동차 범퍼의 역사

카 히스토리

운전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범퍼를 긁어먹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 폭을 통과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는 찰나에 등골이 오싹한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 서고, 칠이 벗겨진 범퍼를 보면 속이 쓰려지기 마련이죠. 요즘은 주차 센서가 흔해지면서 이런 초보적인 실수도 줄었지만, 갓 운전대를 잡은 새내기 운전자라면 으레 겪는 통과의례(?)입니다.


자동차를 이루는 수만 개의 부품 중 소모성 부품을 제외하고 가장 흔하게 망가지고, 또 교체하는 부품이 바로 범퍼입니다. 차대차(車對車) 사고나 보행자 사고는 물론, 운전 미숙이나 행인의 실수 등 다양한 이유로 범퍼가 망가지거나 아예 깨져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오죽하면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범퍼는 소모품"이라며 아예 범퍼로 다른 차를 밀면서 주차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죠.


얼핏 보기에는 별로 튼튼하지도 않은 것이 괜히 달려 있어 수리비만 늘리는 애물단지 같지만, 자동차의 다른 구성품과 마찬가지로 범퍼 또한 오랜 발전을 거쳐 자동차의 파손을 최소화하고, 보행자의 안전도 지키는 형태로 바뀌어 왔습니다. 오늘은 자동차의 양 끝단에 위치한 범퍼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말이 떠난 자리에 쇠파이프가 자리 잡다
태동기 자동차는 그저 말이 없는 마차의 형태였습니다.

1886년 새롭게 출현한 내연기관 자동차가 차세대 탈것으로 서서히 각광 받던 20세기 초, 아직 자동차는 기존의 마차에 원동기를 얹어 놓은 형태에 가까웠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마차에 타고 조종하기 위해서는 어떤 차체 형태가 가장 적합한지, 그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죠.


하지만 적어도 자동차에는 말이 필요 없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습니다. 마차는 통상 말이 맨 앞에서 차체를 끌고, 마부가 맨 앞쪽에 앉아 말을 제어하는 구조였는데요. 자동차는 말이 필요 없으니 차체 앞쪽이 허전하게 비어 있는 형상이었습니다.


이 텅 빈 공간에 장식용 쇠파이프를 가장 먼저 설치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럽 곳곳에서 얇은 철재 구조물을 덧대 차체를 꾸미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차량용 범퍼의 탄생입니다. 이런 범퍼는 보통 차주의 취향에 따라 설치됐는데, 1897년 체코의 네셀도르프(Nesseldorf) 사가 출고 사양으로 장착한 뒤로는 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순정 범퍼'를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자동차의 레이아웃이 정립되면서 차체 앞부분에 장식용 범퍼를 다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초의 범퍼는 철저한 장식품에 불과했습니다. 애초에 이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라는 물건이 그리 빠른 속도로 달릴 수도 없었고, 충돌 시에 대비한 완충 장치 같은 것도 필요 없었죠. 1901년에 고무로 만든 완충용 범퍼도 제안됐지만,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적어 크게 주목 받지는 못했습니다.


자동차의 범퍼는 1910년대까지도 고급 장식품 취급이었고, 보다 대중화된 건 192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범퍼는 기본적으로 차체 앞과 뒤를 장식하는 용도였고, 여기에 더해 자동차가 고성능화 되면서 충돌 사고가 발생하면 차체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보호구의 역할까지 하기 시작했죠.

1930년대 이후 범퍼는 보편적인 차량용 장식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장식의 용도가 컸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범퍼를 각진 쇠파이프 대신 유선형으로 다듬고, 크롬 도금을 올려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또 용도에 따라 험로에서 운용하는 대형 트럭이나 군용차의 경우 두터운 철제 빔(beam)을 장착해 장애물이나 야생동물 따위를 밀어내는 용도로도 사용합니다. 이처럼 기능성보다 장식적 효과를 중시하는 범퍼 설계는 무려 1950년대 이후까지도 이어집니다.



범퍼의 역사를 바꿔 놓은 미국
1950년대, 미국에서는 제트기 스타일의 범퍼가 유행합니다.

1950년대 범퍼의 디자인은 지역 마다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제트기 스타일의 자동차 디자인이 유행하면서 제트 엔진을 형상화한 원추형 범퍼 장식이 등장했고, 유럽에서는 충돌 시 범퍼가 찌그러지거나 크롬이 벗겨지는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빨 형태의 구조물을 덧대는 방식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기존에는 서로 분리된 형태였던 등화류, 라디에이터 그릴, 범퍼, 머플러 등이 일체화된 디자인이 정착됐고, 범퍼 또한 각 차종에 따라 조화로운 형태를 띠게 됩니다.


1960년대에도 여전히 크롬 범퍼가 유행하는 한편, 플라스틱 범퍼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충돌 시 찌그러져 복원에 많은 비용이 들었던 철제 범퍼와 달리, 플라스틱 범퍼는 저속 충돌 시 고유의 탄성으로 충격을 흡수한다는 장점이 있었죠. 미국에서는 1968년형 폰티악 GTO가 처음으로 플라스틱 범퍼를 도입했고, 이내 유럽의 제조사들도 철제 범퍼를 탈피해 플라스틱 범퍼를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5마일 법' 이전과 이후 범퍼 설계의 차이. 충돌로 인한 파손을 최소화한 형태로 바뀝니다.

1970년대는 다양한 규제가 탄생하면서 자동차의 형태나 성능 등에 큰 변화가 찾아온 시기입니다. 범퍼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1971년 미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자동차 외장 보호에 관한 인증 규정을 최초로 도입합니다. 이 규정은 1972년 9월 1일 이후 생산되는 자동차에 대해 시속 5마일(약 8km/h, 후방 충돌은 4km/h)로 충돌 시 안전과 관련된 부품, 이를테면 헤드램프나 연료 장치가 파손되지 않을 것을 골자로 했는데요.


당시 많은 차들은 미관을 위해 범퍼 내부에 램프나 연료 주입구를 결합해 놓은 설계를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품들이 저속 충돌에서도 망가지면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죠. 여기에 더해 1972년 미 의회를 통과한 자동차 정보 및 비용 절감에 관한 법률(Motor Vehicle Information and Cost Saving Act, MVICS)은 보험 비용 부담 등을 줄이기 위해 시속 5마일 이내의 저속 충돌 시 차량의 파손을 최소화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AMC 페이서는 5마일 법과 오일쇼크로 인한 소형차 수요 급증 등이 합쳐져 탄생한 기형적인 디자인을 지녔습니다.

이러한, 이른바 '5마일 법'이 제정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안전과 부담 절감의 목적이었지만, 유럽산 자동차를 견제하기 위한 비관세장벽이라거나, 보험업계가 로비를 통해 관철시켰다는 주장도 있죠. 어떤 이유가 됐든 당시 세계 최대 시장이었던 미국에 차를 팔기 위해서는 이를 지킬 수밖에 없었고, 이 규정에 맞춰 세계 모든 나라의 자동차 디자인도 바뀌게 됩니다.


저속 충돌에서 차의 구조물을 지키려면 범퍼가 돌출될 수밖에 없었고, 헤드램프나 테일램프, 연료 주입구 같은 부품들과는 완전히 분리해야 했습니다. 범퍼가 탄생한 지 70년여 만에 비로소 장식품이 아닌 완충 장치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죠.

손상 금지 규정에 따라 5마일 범퍼가 장착된 메르세데스-벤츠 W116. 돌출된 고무-철제 범퍼가 인상적입니다.

1976년에는 MVICS에 따라 소위 '손상 금지 규정'이 도입됩니다. 1980년 이후 출시되는 모든 차는 시속 5마일 충돌 시 주요 부품 손상은 물론, 범퍼가 10mm 이상 찌그러지거나 19mm 이상 이탈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이를 지키기 위해 범퍼 자체의 강성은 높이고 내부에 스프링이나 완충기를 달아 충격을 흡수하는, 이른바 '5마일 범퍼(5-mile-bumper)'가 탄생합니다.


당연히 제조사들의 불만은 늘었고, 1981년 출범한 레이건 정부는 기업의 부담을 더는 차원에서 손상 금지 규정의 완화를 추진합니다. 5마일 범퍼는 실제로 수리비를 줄이는 효과가 컸기 때문에 소비자 단체는 이에 반발했는데요. 하지만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알려지면서 범퍼 형상에 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제는 보행자까지 보호한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범퍼는 가능한 튼튼하게 만드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범퍼는 "가능한 튼튼하게" 만드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충돌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었던 시절인 만큼, 자동차는 충돌 시 최대한 손상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차량의 수리비도 줄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죠. 더구나 손상 금지 규정이 도입되면서 범퍼 내부에 완충기는 장착할지언정, 범퍼 자체는 최대한 찌그러지거나 깨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충돌 테스트가 도입되고, 충돌 시의 운동 에너지를 차체가 흡수하는 '크럼플 존' 개념이 정립되면서 단순히 튼튼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충격을 고르게 흡수할 수 있는 방안이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철제 범퍼를 탈피해 완충 효과가 뛰어난 플라스틱 외장재와 철제 이너 레일로 구성된 현대적인 범퍼 설계 또한 1980년대부터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보행자 안전이 대두되면서 평평한 범퍼가 대세로 떠오릅니다.

여기에 더해 1990년대 이후에는 보행자 안전성이 자동차 안전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릅니다. 기존의 돌출된 범퍼는 차체 손상을 막는 데에 유리한 반면, 보행자 충돌 시 다리 골절 내지는 심각한 부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90년대 말부터 돌출형 범퍼 대신 평평한 실루엣의 라디에이터 그릴 일체형 범퍼가 대세로 떠오릅니다. 즉, 이전까지 범퍼의 용도가 차량 손상 방지에 집중돼 있었다면, 현대적인 범퍼는 안전성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날의 범퍼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차체 하단부를 멋스럽게  꾸미는 전통적인 장식 효과는 기본이고, 저속 충돌 시 차량 핵심 부품의 보호 장치, 고속 충돌 시 차체 구조물이 손상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충격을 흡수하는 1차 완충 장치, 보행자 충돌 시 보행자의 상해를 최소화하는 보행자 보호 장치의 역할까지 겸합니다.

오늘날 범퍼는 완충 장치를 넘어 첨단 보조 기능 인터페이스로 탈바꿈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최신 차량에는 다양한 전자식 주행 보조 장치가 탑재되면서, 범퍼에 탑재되는 센서의 종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차 보조 장치에 탑재된 초음파 센서와 카메라입니다. 또 자율주행 기능을 위한 레이더나 라이다(LiDAR) 센서도 범퍼 내에 삽입되는 경우가 많죠. 이처럼 범퍼는 소극적인 완충 장치를 넘어 안전한 미래차를 위한 적극적인 첨단 인터페이스의 역할도 겸하게 됐습니다.


때문에 교통사고가 없는 완전 자율주행 시대가 오더라도 범퍼는 그대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통사고가 없다면 완충 장치로서의 역할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여전히 범퍼는 자동차의 멋진 외관을 꾸미고, 다양한 센서들을 탑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으니까요. 미래에는 또 어떤 형태의 범퍼가 탄생하게 될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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