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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Feb 17. 2022

라구나 세카 : 콕스크류와 마쓰다의 고향

랜선 트랙데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차 서킷들은 저마다 보기 드문 구조를 지녔거나 아찔한 배틀이 펼쳐지는 특별한 구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녹색 지옥' 뉘르부르크링 북쪽 코스에는 오벌 헤어핀인 '카라치올라 카루셀'을 비롯해 유명한 구간이 여럿 있고, 벨기에 스파 프랑코샹 서킷의 경우 초고속으로 통과하며 급격한 고저차를 느낄 수 있는 '오 루즈'와 '래디옹' 코너가 유명합니다.


이런 유명 구간들은 트랙의 명성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는데요. 언덕 꼭대기에서 기슭으로 곤두박질치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은 코너로 유명해진 서킷도 있습니다. 바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웨더텍 레이스웨이 라구나 세카(WeatherTech Raceway Laguna Seca)'입니다.

롤러코스터를 연상시키는 8번 코너, '콕스크류'는 라구나 세카의 자랑입니다.

오래 전부터 모터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분들에게는 '마쓰다 레이스웨이 라구나 세카'로도 기억되는 서킷인데요. 올해로 65년에 달하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이 서킷은 단순하면서도 신중한 공략이 요구되는 테크니컬한 레이아웃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8번 코너, '콕스크류'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라구나 세카는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 카운티 북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등 서부 해안의 대도시에서 1~2시간 거리로 접근성이 좋은 편인데, 사진 상으로는 사막 분위기가 물씬 나 내륙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부 해변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입지합니다.


라구나 세카(Laguna Seca)는 스페인어로 '마른 호수(dry lagoon)'라는 뜻인데요. 실제로 트랙 부지에 평소엔 말라 있다가 우기에만 물이 고이는 플라야(playa)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페블 비치의 일반 도로에서 개최된 델 몬테 트로피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안전 문제가 상존했습니다.

서킷의 역사는 1957년 시작됐습니다. 1950년대 라구나 세카와 가까운 페블 비치(Pebble Beach, 페블 비치 콩쿨이 열리는 그 곳이 맞습니다)에서는 '델 몬테 트로피'라는 일반도로 레이스가 펼쳐졌는데요. 좁고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에서 펼쳐지는 레이스에는 수만 명의 관중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지만, 안전에 대한 우려도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특히 1956년 델 몬테 트로피 경기에서 로컬 레이서 어니 맥아피(Ernie McAfee)가 페라리 레이스카를 몰다 나무를 들이받고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페블 비치 시가지에서 개최되는 레이스는 종국을 맞이합니다.

몬터레이 주민과 기업가들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레이스를 속행할 수 있는 경주장을 짓기로 합니다.

하지만 농업과 목축업 외에 마땅한 산업이 없던 지역 주민들에게 5만 명의 관중이 몰리는 자동차 경주는 소중한 관광 상품이었습니다. 이에 지역 인사들은 델 몬테 트로피의 지속적 개최를 위해 안전한 자동차 전용 경주장 건립을 결의하고, 인근 군부대를 설득해 포 사격장으로 쓰이던 마른 호수 부지를 확보합니다. 지역 주민과 상점, 기업체들이 십시일반 모은 건립기금은 거금 150만 달러. 이 기금으로 자동차 경주장 건립 사업이 시작됩니다.

초창기 라구나 세카의 모습. 가운데 텅 빈 타원형 공간이 마른 호수 자리입니다. 현재는 인공 호수가 위치합니다.

1957년 9월 첫 삽을 뜬 경기장 공사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됩니다. 마른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도는 형태의 코스는 불과 2개월 만에 포장 공사를 마쳤고, 곧바로 11월 델 몬테 트로피를 성공적으로 개최합니다. 라구나 세카의 개막전에는 100여 대의 레이스카가 출전하고 3만 5,000여 명의 관객이 몰린 것으로 기록됐습니다.


라구나 세카의 상징과도 같은 콕스크류(the Corkscrew) 코너 역시 건립 당시부터 있었는데요. 이 코너가 탄생한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지반 다지기 공사가 한창이었을 당시, 구릉 꼭대기에서 작업 중이던 불도저 기사는 점심 식사를 위해 구릉을 내려가야 했는데요. 어떻게 내려갈지 고민 중이던 기사를 "아무렇게나 내려오라"고 동료가 재촉했고, 이에 기사는 꼭대기에서 그대로 불도저를 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아무렇게나 내려온 길'이 콕스크류 코스가 된 것이죠.

라구나 세카는 수많은 레이스를 유치하며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서킷으로 성장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문을 연 라구나 세카 레이스웨이는 이후 캔앰, 트랜스-앰, IMSA GT, 포뮬러 5000, 인디카, 아메리칸 르망 시리즈 등 수많은 레이스를 개최하며 캘리포니아 중부를 대표하는 서킷으로 자리잡습니다.


원래는 상술한 것처럼 마른 호수 주변을 달리는, 비교적 단조로운 레이아웃이었는데요. 포뮬러원(F1) 미국 그랑프리가 개최지 이전을 고려하면서 F1 유치를 위해 1987년 국제 규격에 맞춰 대규모 보수 공사를 치르며 오늘날과 비슷한 레이아웃이 완성됩니다. 현재의 2~5번 코너 구간이 신설되고, 서킷의 안전도가 대폭 향상된 것도 이 때의 일입니다(비록 F1 유치에는 실패했지만요).

2000년대에는 마쓰다가 타이틀 스폰서로 등극하며 서킷의 유명세를 더합니다.

2000년부터는 일본 자동차 회사인 마쓰다가 트랙의 타이틀 스폰서로 나서면서 공식 명칭이 '마쓰다 레이스웨이 라구나 세카'로 바뀝니다. 마쓰다의 지원 하에 라구나 세카의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고, 시뮬레이션 레이싱 장르의 게임이 등장하면서 해외의 드라이버들에게도 많이 알려집니다. 아마 많은 국내 드라이버들도 심레이싱을 통해 접해보셨을텐데요. 2018년에는 마쓰다의 스폰서십이 종료되면서, 차량용 매트로 유명한 자동차 용품업체 웨더텍(WeatherTech)이 타이틀 스폰서가 됩니다.

라구나 세카는 총 11개의 코너로 이뤄진 반시계 방향 서킷입니다.

라구나 세카는 총 11개의 코너로 이뤄져 있습니다. 스타트 라인을 통과한 뒤 고속으로 완만하게 통과하는 1번 코너를 지나면 거대한 헤어핀(2번 코너)이 등장하고, 이후 완만한 각도의 코너가 이어집니다. 메이저 서킷 중에서는 비교적 보기 드문 반시계 방향 코스라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3~7번 코너에 이르는 구간은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뤄져 공략이 쉽지 않습니다.

평면도 상의 레이아웃만 보면 단순하고 난이도가 쉬운 코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요. 3~7번 코너에 이르는 코스 절반 가량의 구간이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뤄져 있어 고저차에 따른 세밀한 컨트롤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하중이 뒷편에 쏠리는 만큼 이 구간에서 전륜구동 차량은 언더스티어를, 후륜구동 차량은 코너 탈출 시의 파워 슬라이드로 인한 오버스티어를 겪을 수 있습니다.

18m의 고저차를 자랑하는 콕스크류는 라구나 세카의 별미이자 최대 난코스입니다.

두 번 꺾이는 6번 코너를 지나면 구릉 정상을 향해 이어진 라할 스트레이트(Rahal Straight) 구간이 나오고, 그 끝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린 7번 코너를 지나면, 마침내 그 유명한 콕스크류 구간이 등장합니다. 마치 낭떠러지처럼 에이펙스가 보이지 않는 콕스크류에 진입하면 순식간에 18m를 하강하며 곧바로 우코너(8A 코너)가 이어집니다. 아무리 숙련된 드라이버라도 정확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집중력과 담력이 요구되는 구간입니다.

노폭이 좁고 타이트한 11번 코너를 탈출하면 메인 스트레이트로 돌아옵니다.

콕스크류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되며 9~10번 코너를 고속으로 통과합니다. 그리고 노폭이 좁고 타이트한 마지막 11번 코너를 지나면 메인 스트레이트로 돌아오는 구조입니다. 전반적으로 인해 하중 이동이 잦고, 정확한 브레이크 타이밍이 요구되는 타이트한 코너와 고속 코너가 번갈아 배치돼 있는 만큼 완벽한 공략을 위해서는 높은 숙련도가 요구되는 서킷입니다. 큰 고저차와 브레이크 부담이 커 캘리포니아 주에서 완성차 회사들의 테스트 트랙으로도 애용된다고 하네요.


몬터레이 베이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라구나 세카는 6,210만 달러(한화 약 744억 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520만 달러(한화 약 62억 원)의 세수 확충 효과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모터스포츠는 물론 몬터레이 카운티의 지역 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트랙 인근 작은 마을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라구나 세카를 둘러싼 갈등이 커 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해안 지역에 고급 주택가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서킷에서 발생하는 소음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죠. 지역 주민들의 염원으로 지어진 경주장이 이제는 갈등의 씨앗이 된 셈입니다.

터무니 없는 소음 규제에 로컬 드라이버들은 기이한 '라구나 세카 파이프'를 장착하고 주행합니다.

부유층의 '민원 폭탄'을 맞은 몬터레이 카운티는 트랙 주행 차량에 대해 90dB(데시벨)의 소음 제한을 걸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소음 규제가 엄격한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승용차의 소음 제한이 105dB죠. 즉, 레이스 트랙 치고는 터무니 없이 강력한 규제를 걸어버린 셈인데요.


심지어 트랙 내부에 소음 측정 부스를 설치해놓고,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소음 측정을 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라구나 세카의 이용객이 크게 줄었습니다. 몇몇 동호인들은 소음이 트랙 바깥쪽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트랙 안쪽 방향으로 꺾인 머플러(라구나 세카 파이프라고 부릅니다)를 장착하기도 하지만, 성능 저하는 물론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워 드라이버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습니다.

소음을 둘러싼 갈등이 원만히 해결돼 라구나 세카가 오랫동안 존속하길 바랍니다.

비교적 튜닝과 모터스포츠 문화가 성숙한 미국에서 이런 갈등이 발생한다는 소식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주민들의 불편과 모터스포츠의 발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인 만큼, 부디 좋은 타협안을 도출해 라구나 세카의 명성이 오래도록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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