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 히스토리
열쇠는 기원전 4,000년 전부터 보안을 위해 사용돼 온 도구입니다. 자물쇠나 금고, 문 따위를 열고 잠그는 데에 사용되는 만큼 열쇠는 권력이나 부를 상징하기도 했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상징적 의미가 반영돼 오고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열쇠가 쓰이는 건 앞서 이야기한 잠금장치와 자동차, 둘 뿐입니다. 다른 가전제품이나 생필품에는 열쇠가 달려있는 모습을 보기 힘든데요. 그만큼 자동차는 일상과 밀접한 제품이면서 동시에 소중한 재산으로 여겨지고, 자동차의 시동을 걸 수 있는 열쇠 또한 보안장치를 넘어 재력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쓰이기도 하는데요.
현존하는 거의 모든 차에는 고유의 키와 시동 장치가 달려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잠자는 차를 깨우는 단 하나의 열쇠, 자동차 키에는 어떤 역사가 담겨 있었을까요?
힘으로 걸던 시동, 키 하나로 해결되다
자동차 키의 역사를 알아보기 전에, 시동의 원리를 먼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기본적인 4행정 내연기관은 연소실 내에서 발생하는 폭발력으로 피스톤을 밀어내고, 그 힘으로 크랭크축을 회전시켜 구동력을 출력축으로 전달합니다. 크랭크축에 벨트나 체인으로 연결된 밸브·캠샤프트가 타이밍에 맞춰 구동하면서 끊임없이 연료와 흡기를 공급하고, 또 연소가스를 배출하는 구조인데요.
엔진의 시동을 걸 때는 이 크랭크축에 강한 회전력을 가해야 합니다. 크랭크축이 회전하면 맞물린 기구들이 연쇄적으로 작동하면서 시동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초창기의 내연기관은 이 크랭크축을 회전시키기 위해 커다란 플라이휠을 직접 잡아 돌려야 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인 벤츠 파텐트-모터바겐도 차체 뒷쪽의 플라이휠이 곧 시동장치였죠.
내연기관의 발전에 따라 20세기 들어서는 플라이휠을 직접 돌리는 방식은 사라졌지만, 인력으로 크랭크축을 돌리는 방식은 오래도록 유지됐습니다. 차체 앞쪽에 크랭크축과 연결된 손잡이가 달려 있는 핸드 크랭크 스타터 방식이 대표적인데요. 기본적인 원리는 오늘날에도 일부 소형 오토바이에 달린 킥 스타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이 장치는 플라이휠 방식보다는 편리했지만 여전히 많은 체력이 소모됐고,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가하다가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사고도 심심찮게 발생했습니다.
1910년에는 미국의 델코(Delco) 사에서 전기 크랭크 스타터를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이 장치는 내장된 배터리를 사용해 전기 모터로 시동을 거는 방식이었는데요. 진땀을 빼며 인력으로 시동을 걸 필요가 없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전기 스타터 방식은 오늘날 스타터 모터의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계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모터의 성능이 저열해 대형 엔진에서는 전기 스타터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전기만 연결되면 누구나 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에 차량 도난 사고가 엄청 잦았다는 것입니다. 마침 자동차의 고성능화와 더불어 클로즈드 콕핏 설계의 자동차가 늘어나던 시기였고, 이에 따라 차량의 보안을 위해 완전 밀폐형 차체에 차 문을 열쇠로 잠그는 방식이 보편화됩니다. 차량용 열쇠가 처음 등장한 것이죠.
이후 차량용 키는 널리 보급됐지만, 키를 돌려 시동을 거는 턴키 스타터 방식은 한참 뒤인 1949년에야 크라이슬러에 의해 소개됩니다. 이전의 전기식 스타터는 배터리를 연결하고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거는 방식이었는데, 열쇠로 잠근 문을 열기만 하면 쉽게 시동을 걸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린 아이가 시동 버튼을 눌러 멋대로 시동을 걸거나 사고가 나기도 했죠.
자동차의 시동에도 보안성을 더한 턴키 스타터는 이후 자동차 시동의 표준이 됐습니다. 그것도 무려 40년 가까이 말이죠. 반세기 가까운 시간동안 자동차는 괄목할 발전을 이뤘지만, 열쇠를 꽂고 돌리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물론 소재나 디자인에 있어서는 트렌드를 따라 꾸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초에는 접어서 보관할 수 있는 폴딩 키의 초기 형태가 정립됐고, 자동차의 황금기였던 1960~1970년대에는 자동차 회사의 로고를 열쇠의 머리 부분에 새긴 '크레스트 키'가 유행했습니다. 훗날에는 키에 플라스틱 그립이 적용되면서 크레스트 키의 전통에 따라 그립에 엠블럼을 새기는 것이 당연시됐습니다.
자동차 키 : 편의성과 보안의 발전사
이처럼 자동차의 키는 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자동차의 이용을 위해 탄생한 장치입니다. 문을 잠그고 시동을 거는 것까지 하나의 키로 할 수 있게 되면서 편의성과 보안 양면에서 진일보했지만, 이후에도 키의 진화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선 키를 꽂고 돌리는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별도의 자물쇠를 달고 플라이휠을 잡아 돌리는 것보다야 훨씬 편리했지만, 본디 인간이란 더 편한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법이죠. 특히 1980년대 이후 전자 장치가 크게 발달하면서 차키에도 전자 장치를 더할 방안이 연구됩니다.
키를 직접 꽂지 않고 문을 열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장치는 1980년 포드가 출시한 '세큐리코드(SecuriCode)' 시스템입니다. 원리는 간단한데요. 운전석 문에 비밀번호를 입력할 수 있는 번호 패드를 설치해 키 없이도 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 세큐리코드 시스템은 포드, 머큐리, 링컨 등의 브랜드에 적용됐고, 현재 출시되는 최신 포드·링컨 모델에도 탑재되고 있습니다.
비밀번호 방식보다 더 보편적인 리모컨 방식의 개폐 장치는 1982년 출시된 르노 푸에고에 처음 탑재됐습니다. 이 리모컨 시스템은 르노 외에도 AMC 등 일부 브랜드에 적용되다가 1989년 GM이 북미 시장에 최초로 선보이면서 대중화 됩니다.
이런 키리스 엔트리 장치들은 사용자의 편의성을 크게 높여줬지만, 보안 측면에서는 특별히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밀번호가 유출되거나 리모컨의 보안 허점을 노려 차량 침입이 쉬워질 수 있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시동용 키에는 이렇다 할 보안장치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물리적으로 열쇠를 따기 어렵게 만드는 방식이 고안됐습니다. 보통의 차키는 고유 패턴에 따라 열쇠 외부를 깎는(external cut) 방식이었는데, 이런 방식은 간단한 도구만 있어도 돌파됐죠. 때문에 1980년대 고급차를 중심으로 두꺼운 직사각형 열쇠의 안쪽에 특수 장비로 고유 패턴을 깎는 인터널 컷(internal cut) 방식의 키가 도입됩니다. 그러나 인터널 컷 키도 완벽한 보안을 담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바로 1994년 독일의 콘티넨탈이 개발한 이모빌라이저(immobilizer)입니다. 이모빌라이저는 열쇠의 그립 부분에 탑재된 초소형 트랜스폰더로, 키박스에 키를 꽂으면 차량의 ECU와 통신을 통해 고유 코드를 확인합니다. 이 고유 코드가 맞지 않으면 똑같이 깎은 키라 하더라도 시동을 차단하는 것이 이모빌라이저의 원리입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탑재할 수 있는 데다 보안 성능이 탁월하기 때문에 이모빌라이저는 빠르게 보급됩니다. 독일, 영국, 핀란드 등은 1998년부터 이모빌라이저 장착을 의무화 했고, 호주와 캐나다 등 다른 선진국도 이를 따릅니다.
1998년에 출시된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W220)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세계 최초로 키리스-고(Keyless-Go), 즉 스마트키를 상용화합니다. 1995년 독일의 지멘스가 고안한 이 시스템은 키와 차량 간에 저주파 통신을 통해 키가 근접한 상태에서 버튼만 누르면 차량의 잠금이 해제되는 원리였습니다. 즉,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지 않고도 차의 문을 열고 탑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초창기 스마트키 시스템은 차에 탄 뒤에는 키를 물리적으로 꽂아 시동을 걸어야 했지만, 2000년대에는 시동을 위한 이모빌라이저 통신도 원격으로 가능해지면서 아예 버튼식 시동 시스템이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한때 최고급 차의 상징이었던 스마트키는 오늘날 경차나 화물차, 심지어 오토바이에도 탑재되면서 대중적인 편의사양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꽂고 돌리는 키에서 디지털 정보로
꽂고 돌려야 했던 과거의 키는 그 형태의 제약이 클 수밖에 없었지만, 스마트키가 대중화 되면서 투박했던 키의 디자인 또한 일대 전기를 맞이합니다. 꽂을 필요가 없는 키라면, 키의 디자인 또한 자유롭게 바꿀 수 있으니까요.
제조사들은 저마다 키에 화려한 장식 요소를 더하기 시작했는데요. 가령 911의 실루엣을 닮은 포르쉐의 스마트키나 크리스탈을 가공해 만든 애스턴마틴의 키가 유명합니다. 고급화를 위해 키의 표면을 차체와 같은 컬러로 칠하거나 카본파이버, 가죽 같은 고급 소재로 덮는 것도 이제는 낯설지 않습니다.
BMW는 아예 스마트키에 차의 다양한 기능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는 터치 디스플레이를 탑재하기도 했는데요. 비록 자주 충전해야 하고 부피가 커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됐지만, 키 자체가 하나의 커넥티드 디바이스처럼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재규어 랜드로버는 일부 SUV 모델에 손목시계처럼 찰 수 있는 액티비티 스마트키를 제공합니다. 아웃도어 활동이나 수상 액티비티를 즐길 때에도 문제가 없도록 완전 방수 기능을 탑재했는데요. 값비싼 키를 잃어버리거나 고장낼 우려를 최소화하면서 스타일까지 챙기기 위함입니다.
자동차 업계의 이단아, 테슬라의 경우 엔트리 모델인 모델 3에는 기본 구성품으로 스마트키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저 카드 형태의 키를 2장 제공할 뿐인데요. 모델 3는 문을 열고 차에 타면 별도의 시동 절차도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카드 키 만으로도 모든 기능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렇게 편리해진 스마트키 마저도 번거로워 아예 키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차량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디지털 키'라는 것인데요. 차량의 인터넷 커넥티비티 기능과 스마트폰의 NFC 태그 기능 등을 조합해 스마트폰을 키처럼 활용하는 겁니다.
테슬라가 전용 앱 등록을 통한 디지털 키 기능을 제공 중이며, 국산차에도 순차적으로 디지털 키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문 인식과 같은 생체 인식 기술까지 접목되면서, 필수품이었던 키가 이제는 액세서리 역할조차 내려놓고 아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디지털 키가 더욱 보편화된다면 미래에는 아예 차를 구입해도 키를 제공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의 소유 개념이 희박해지는 서비스로서의 모빌리티(MaaS) 환경에서는 더더욱 키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쇳대를 꽂아 문을 열거나 시동을 거는 행위 자체가 진기하게 보일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이제 물리적인 키는 사라지고 디지털 데이터가 가상의 키 역할을 하는 시대지만, 여전히 주머니 속의 묵직한 감각과 키를 꽂고 돌려 시동을 거는 손맛을 포기하기 어려운 건 저 뿐일까요? 잠들어 있는 자동차에 생명을 불어넣는 키의 즐거움 만큼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