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요즘 자동차 뉴스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전기차와 관련된 이야기로 점철돼 있습니다. 그 만큼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와 업계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입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세계적으로 전기차 판매량이 크게 늘면서, 단순한 기대감을 넘어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각 나라마다 전기차의 트렌드에도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역에서 두루 잘 팔리는 테슬라 정도를 제외하면, 미국에서는 대형 SUV나 픽업트럭의 전동화 버전이 속속 등장하는 한편, 유럽에서는 소형 해치백이나 크로스오버 전기차가 인기를 끌고 있죠.
시장은 언제나 소비자의 니즈에 따라 움직입니다. 각 지역에서 이처럼 전혀 다른 형태의 전기차가 만들어지는 건, 단순한 소비자의 선호도를 넘어 사용 패턴 등을 철저히 고려한 결과물입니다. 왜 미국에서는 거대한 픽업트럭 전기차가, 유럽에서는 소형 전기차가 유행하는 걸까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장 인기 있는 차종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시장이 전통적으로 픽업트럭의 성지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020년 미국에서 판매된 픽업트럭은 296만여 대로, 단일 차종으로는 가장 큰 시장을 형성했습니다. 같은 기간 미국의 전체 승용차 및 소형 트럭 판매량이 1,450만 대 정도였으니, 전체 시장 중 약 1/5을 픽업트럭이 차지하는 셈이죠.
2020년 990만 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판매량 중 B-세그먼트에 해당하는 소형차는 230만여 대, 소형 SUV는 200만여 대가 팔려 43%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전기차를 개발할 때 가장 대중적인 수요가 많은 차급을 노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미국과 유럽의 전기차 개발 방향이 달라진 큰 이유가 바로 주행거리의 차이입니다. 소형 전기차는 차체 크기의 한계로 배터리 용량에 제약이 크고, 항속거리가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신 전기차들의 WLTP 기준 1회 충전 시 항속거리가 500km을 넘나드는 시대지만, 여전히 소형 전기차 중에는 항속거리 200~300km 내외의 차량이 많은데요.
유럽연합 내 승용차의 연 평균 주행 거리는 1만 1,000km 정도로 매우 짧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짧은 이탈리아의 연 평균 주행 거리는 8,400km에 불과하고, 가장 긴 편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도 1만 3,000km에 그칩니다. 대중교통 사용률이 높고, 자가용은 근거리 운행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항속거리가 짧아도 큰 불편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도심 지역에서 사용하는 항속거리 50~100km 내외의 초소형 전기차가 잘 팔리는 것도 이런 주행 패턴 특성을 반영합니다.
반면 미국의 승용차 연 평균 주행 거리는 2만 3,000km로, 유럽의 두 배가 넘습니다. 미국은 상업·사무 구역과 주거 구역이 철저히 분리돼 있고, 자가용 이용률이 매우 높습니다. 소위 말하는 "장 보러 마트 다녀오는 데 왕복 100마일"인 환경이기 때문에, 유럽에서 인기 있는 소형 전기차로는 충전의 불편함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장 특성 때문에 미국의 전기차 시장은 자연스럽게 항속거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테슬라가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도 경쟁 모델 대비 월등히 긴 항속거리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현재 출시를 앞두고 있는 픽업트럭형 전기차들 역시 대용량 배터리를 탑재하고 400~500km 이상의 항속거리를 목표로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 시장에서는 일찌감치 전기 픽업트럭을 만들어도 됐을텐데, 정작 아직까지 시판된 모델은 없는 상황이죠. 유럽에서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닛산 리프, 르노 조에 등의 소형 전기차가 거리를 활보하고, 초소형 전기차도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는 초기 전기차 기술력의 한계와 픽업트럭 시장의 보수성에 기인합니다.
전기차는 주행거리를 늘리기 위해 배터리 크기를 늘리고, 그러면 무게가 증가하면서 다시 주행거리가 줄어드는 딜레마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배터리의 절대적 성능이 향상되지 않으면 무거운 픽업트럭의 주행거리를 담보하기 어려웠습니다. 최근에 들어서야 에너지 밀도가 크게 향상되면서 주행거리가 긴 픽업트럭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죠. 게다가 승용차와 달리 픽업트럭은 화물을 싣거나 트레일러를 견인하는 등 큰 부하가 걸리는 운행 빈도가 높기 때문에, 모터의 성능과 내구성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또 픽업트럭은 미국 중남부 지역이 핵심 판매처입니다. 전통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소비 성향을 보이는 데다, 석유 산업이 발달한 텍사스 등지에서는 전기차에 대한 반감도 강합니다. 이런 소비자들에게 전기 픽업트럭이 먹힐 지에 대한 제조사들의 신중론과 더불어, 이전 트럼프 정부 당시 미국의 전기차 지원 축소 등의 영향으로 픽업트럭의 전동화는 여타 세그먼트에 비해 늦어졌습니다.
결국 각 지역의 소비 성향, 운행 패턴, 기술력, 제도적 지원 등 여러 차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픽업트럭이, 유럽에서는 소형차가 전동화의 선봉에 선 것입니다. 미국 시장에서는 포드 F-150 라이트닝, 테슬라 사이버트럭, GMC 허머 EV 등이 고객 인도를 앞두고 있고, GMC 시에라와 쉐보레 실버라도 등의 전동화 모델이 출격을 준비 중입니다. 한편 유럽에서는 르노 조에, 푸조 e-208, 혼다 e, 미니 해치백, 닛산 리프 등을 필두로 최근에는 폭스바겐 I.D.3, 현대 아이오닉 5 등 준중형급 전기차로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한편, 이들과는 별개로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 중인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가장 볼륨이 크고 경쟁도 치열한 중형급 SUV로부터 전동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SUV의 형태가 배터리 배치에도 용이하고, 세단 대비 차량 가격대가 높아 전기차의 비싼 가격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르세데스-벤츠 EQC, BMW iX, 아우디 e-트론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우리나라 승용차의 연 평균 주행 거리는 1만 4,000km 정도로, 미국보다는 훨씬 짧고 유럽보다는 조금 많은 수준입니다. 국토 면적도 넓은 편이 아닌 데다 육로로 해외 여행을 가기도 어려운 환경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소비자들은 항속거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지난 몇 년 간 운전자를 대상으로 한 여러 설문조사에서도 항속거리는 전기차를 살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로 매번 압도적 1위에 올랐는데요.
이는 우리나라의 주거 환경이 단독 주택보다는 아파트나 빌라 같은 다세대 주택의 비중이 높은 데에 기인합니다. 다세대 주택의 경우 매일 안정적으로 충전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 번 충전으로 오랫동안 운행할 수 있는 항속거리 긴 전기차를 선호하는 것이죠. 특히 전체 인구 중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거주하는 만큼, 수도권에서는 전기차 충전 경쟁이 더욱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급으로 보자면, 한국 소비자들은 퍼스널 커뮤터보다 패밀리 카 선호도가 높은 만큼 소형차보다는 준중형~중형급의 선호도가 매우 높습니다. 현재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은 테슬라 모델 3, 현대 아이오닉 5, 기아 EV6 등인데요. 국내 신차 판매 트렌드로 미루어 보자면 중형급 이상의 SUV형 전기차가 시장의 주류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전기차 시장은 아직 성장 단계인 만큼, 제조사들은 각자의 주력 시장에서 최대한 수익을 낼 수 있는 방향으로 전기차를 개발해 나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제조사의 전기차 개발 전략을 통해 각 시장의 자동차 구매 트렌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들이 전기차 풀 라인업을 구축할 계획이기 때문에, 이처럼 지역 별·브랜드 별로 서로 다른 차급에서 시작된 전동화는 모든 세그먼트로 확산돼 나갈 전망입니다. 그 때가 되면 또 각 시장의 전기차 트렌드는 어떻게 바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형태의 전기차를 사고 싶으신가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