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길고 힘들었던 코로나19 팬데믹 터널이 끝나가는가 싶더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다시금 국제 정세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침공이 국제 정세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코로나19보다도 훨씬 크고 심각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요.
여러 국가와 기업들이 경제적 피해를 감수하며 대(對)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는 가운데, 자동차 업계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러시아 시장에 차를 팔고, 못 팔고의 문제를 넘어 글로벌 자동차 공급망의 혼란이 이번 전쟁으로 인해 더욱 장기화될 전망입니다. 러시아에 진출 중인 국내 자동차 회사들의 영업에 적신호가 켜진 건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반도체 대란으로 잔뜩 위축된 글로벌 자동차 산업에 불어닥친 전쟁의 여파는 과연 언제쯤 해결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우크라이나 침공이 자동차 산업에 미친 영향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가장 체감되는 문제는 원자재 가격 폭등입니다. 이미 유가 폭등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에게도 체감이 될 정도인데요.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 제재의 일환으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 석탄 등 에너지 수입이 중단 및 감축되면서 유가는 무서운 속도로 상승 중입니다. 최악의 경우 배럴 당 200달러 이상으로 치솟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물론 휴전 협상 타결 여부 등 여러 변수에 따라 진정세로 돌아설 수도 있지만, 원유 가격 상승에 따라 오른 정유 가격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입니다. 이로 인해 지난해부터 지속되고 있는 글로벌 물류 대란은 당분간 악화일로를 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르는 건 유가 뿐이 아닙니다. 반도체와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에 필수적인 각종 원자재 가격도 상승세입니다. 특히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네온 가스의 경우, 우크라이나가 글로벌 생산량의 70%를 차지합니다. 더욱이 네온 가스 제조 원료는 러시아에서 수입되기 때문에 전쟁이 멈추더라도 생산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밖에도 크립톤·제논 등 반도체 원자재, 니켈·리튬 등 배터리 원자재, 배출가스 후처리 장치에 사용되는 백금·팔라듐, 차체 내·외장과 배터리팩 구조물 제작에 쓰이는 알루미늄 등 자동차 산업에 두루 사용되는 여러 원자재가 러시아로부터 수입되고 있습니다. 경제 제재의 일환으로 이러한 원자재들의 수입 루트가 막히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이 더 악화되는 건 물론,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생산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 수입처를 확보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나라에서도 니켈을 비롯한 여러 원자재가 생산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들 국가에서는 채굴 과정에서의 환경 오염이 더 심하고, 러시아보다 훨씬 먼 거리를 운반해야 하는 만큼 운송비 부담이 늘고 전생애주기 평가(Life Cycle Assessment, LCA) 관점에서 봤을 때 탄소배출량이 증가하게 됩니다. 장기적으로는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없는 셈입니다.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각국의 탄소중립 정책에도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당초 자동차 업계는 수요 증가에 따라 배터리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 2024~2025년께 내연기관차와 배터리 전기차의 가격이 같은 수준이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그 시점이 지나면 전기차 보급이 폭발적으로 이뤄지며 탄소 중립을 위한 내연기관 퇴출 수순을 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반도체 품귀 현상과 물류 대란, 그리고 연이어 터진 러시아발 악재로 전기차 보급이 지연되고, 오히려 가격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산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이 악영향을 받을 전망입니다.
이 밖에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등지에는 값싼 노동력의 이점을 내세워 와이어링 하네스 등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위치하고 있는데요. 이들 공장 또한 가동을 멈추면서 반도체 외의 차량용 부품 공급에도 당분간 차질을 빚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 자동차 업계도 전쟁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차 그룹으로선 진퇴양난의 입장에 처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대러 제재로 인해 공장 가동을 중지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공들여 온 러시아 시장 점유율에 타격을 입을까 우려가 커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차는 2000년대부터 러시아 시장 공약에 힘썼습니다. 2010년 현지 공장 완공 후에는 현지 특화 모델까지 개발해 가며 소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현지 시장에서 연간 37만여 대를 팔며(현대차·기아·제네시스 포함) 점유율 2위에 올랐습니다. 현대차의 글로벌 판매량 중 러시아 시장의 비중은 약 6% 정도로, 주력 시장은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대러 제재의 일환으로 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부품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이미 지난 1일부터 가동을 멈췄습니다. 현대차는 우선 월말까지 가동을 중단한다는 방침이지만, 전쟁의 향방에 따라 사실 상 무기한 가동 중단이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 대러 수출량의 15%를 차지하는 자동차 부품 산업에도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여기에 경제 제재로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수익성이 악화되고, 러시아 정부가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해 무역대금을 달러화가 아닌 루블화로 지불할 수 있게 되면서 큰 환차손을 입을 것으로 우려됩니다. 현대차 입장에서는 러시아 시장을 유지하자니 엄청난 손해는 물론 브랜드 이미지가 악화될 수 있고, 러시아를 떠나자니 오랫동안 쌓아 올린 점유율을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죠.
특히나 현대차로선 과거 사드(THAAD) 배치 문제로 공들이던 중국 시장에서 큰 손해를 본 적이 있는 만큼, 정치·외교적 급변 사태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많은 갈등과 충돌을 겪고 있습니다. 길게 보자면 유럽 난민 사태, 미중 무역 전쟁, 코로나19 팬데믹, 글로벌 물류 대란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냉전 종식 이래 수십 년 간 전진해 온 세계화에 제동이 걸리고, 자국 우선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쟁 이후 러시아는 서방에 맞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할 것이며, 유럽은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더 강하게 단결할 것입니다. 기존 국제 질서가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주도 하에 확립됐다면, 이제는 유럽연합과 러시아 등의 부상으로 다극화 체제로 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죠.
이런 정치 지형의 변화는 자동차 산업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수시로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공급 불안은 제조사들의 장기 전략 수립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고, 미래에는 단순히 자동차를 잘 만드는 걸 넘어서 안정적인 원자재 및 부품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 완성차 회사의 가장 큰 경쟁력으로 부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고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조속히 우크라이나가 평화를 되찾고 자동차 산업을 비롯해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혼란이 잦아들길 기원합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