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알, 잉어, 로또, 그리고 운명의 착각

'우연'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마음에 대해.

by 엄마의 왈츠

"언니! 대박이지! 내 남자친구랑 언니랑 생일이 똑같아! 소름 돋지 않아? 이건 진짜 운명이야! 우리가 가족이 될, 결혼할 운명!"



여동생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돌고래 초음파처럼 터져 나왔다. 제부 될 사람과 내 생일이 같다는 기막힌 '우연'에, 동생은 온 우주가 자신들의 결혼을 축복하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순수한 들뜸 앞에서 나는 차마 "어, 그 '우연'이라는 거 말인데..."라며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대신, 뇌리를 스쳐 가는 내 인생의 기막힌 '우연' 컬렉션을 조용히 복기할 뿐이었다.



# 장면 1. 쌍알의 배신



때는 바야흐로 20대 중반, 새로운 꿈에 도전하겠다며 비장하게 면접을 앞둔 날이었다. 저녁이나 해 먹으려고 마트에서 사 온 계란을 '톡' 깨뜨렸는데, 세상에. 노른자가 두 개인 '쌍알'이 아닌가! 오, 길조인가?



두 번째 계란을 깼다. 또 쌍알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 남은 계란을 모조리 깨뜨려봤다. 열 개들이 한 판이, 거짓말처럼 전부 쌍알이었다.



"됐다! 이건 합격 계시다!"

나는 부엌에서 혼자 덩실덩실 춤을 췄다. 이런 기적 같은 우연이라니! 하늘이 나의 도전을 응원하고 있구나!



다음 날, 신이 내린 합격 부적이라도 받은 양 자신만만하게 면접장으로 향했다.



결과는? 광탈. 아주 시원하게 똑! 떨어졌다. 이런.. 젠장... (그런데 열 개들이 한판이 모두 쌍알일 확률이 얼마일까..)



# 장면 2. 생일이라는 숫자의 데자뷔



수년 뒤, 우여곡절 끝에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 내 인생의 스승님이라 여긴 분의 첫 세미나에 참석한 날, 강의실 문에 붙은 호수를 보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1004호'. 내 생일이 10월 4일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거다. 쌍알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운명의 시그널이다. 상담은 나의 천직이며, 내 인생의 꽃길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그렇게 사명감에 불타올라 시작한 나의 길. 하지만 몇 년 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에 내 사명길은 길바닥 과자처럼 '바사삭' 부서져 내렸다. 생일과 똑같던 세미나실 호수는, 그저 수많은 숫자 조합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런... 쯧쯧




# 장면 3. 잉어, 로또 그리고 하나님



그로부터 몇 년 후, 이러다 정말 길거리에 나앉겠다 싶은 공포가 온몸을 휘감던 어느 날 밤이었다. 침대에 엎드려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처절하게 기도하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글쎄, 꿈에! 집채만 한 붉은 비단잉어 세 마리가 유유히 헤엄을 치는 게 아닌가!



눈을 뜨자마자 터져 나오는 감사 기도와 함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미천한 저를 굽어살피시는군요!"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지갑을 들고나가 로또를 샀다.



결과는? 으하하하. 당연히 꽝! 나는 그날 밤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다시는 이런 미신 따위에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으헝헝.



#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동생에게



이렇듯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우연'이라는 낚싯바늘에 기가 막히게 낚여왔던 나다. 쌍알에, 생일 숫자에, 심지어 꿈속 잉어에게까지 영혼을 저당 잡힐 뻔했던 내가, 잔뜩 들떠 '운명'을 외치는 동생에게 과연 어떤 조언을 했을까?



"야, 정신 차려. 우연은 그냥 우연일 뿐이야!" 라며 '팩폭'을 날렸을까?



"언니, 그래서 내 남자친구랑 언니랑 생일 같은 거... 진짜 운명 맞지?"

"... 응. 운명 맞네."

"그치! 대박이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랑 생일이 똑같아서 운명인 게 아니라, 네가 그 사람을 보고 그렇게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운명인 거야. 세상 모든 우연을 다 끌어와서라도 그 사람과 함께할 이유를 찾고 싶게 만드는 거. 그게 진짜 사랑이고 운명이지."



내 인생의 수많은 '우연'들은 합격이나 돈다발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쌍알 열 개는 근사한 계란말이가 되어 나의 허기진 저녁을 채워줬고, 1004호 강의실은 내게 소중한 지식과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 고마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잉어 꿈은 절망의 끝에서 한 번 더 반성의 기도를 하는 마음을 주었다.



어쩌면 우연은, 그 자체로 '정답'이 아니라
힘든 길을 걸어갈 우리에게
'이거 봐, 재밌지?' 하며 윙크를 날리는
하늘의 장난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동생아. 너의 운명을 마음껏 즐기렴. 물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부 생일날엔 내 몫까지 미역국 두 그릇 끓여주길 바란다. 혹시 알아? 그 정성에 하늘이 감동해 나한테도 로또 번호를 알려줄지. (하나님, 농담인 거 아시죠!!)



P.S. 저만 이런 바보 같은 희망을 품어본 건 아닐 거예요. 여러분은 어떤 '우연'에 기대를 걸어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