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초. 차가운 가을비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건물을 적시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김도윤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불안한 파동 같았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진 수사와 범인 검거의 여파로 김도윤은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몸은 여전히 잔류 사념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최면술사 차민준을 검거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을 주었다. '침묵의 증인' 사건은 이제 법의 심판대에 오를 차례였다. 그는 차민준의 악행이 마침내 법의 이름으로 단죄될 것이라는 옅은 기대를 품었다. 오랜 시간 그를 괴롭히던 악몽이 끝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김도윤의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11부. 검거된 최면술사 차민준은 법정에서 예상치 못한 교활한 변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변호인은 노련한 말솜씨와 법적 지식을 동원해 차민준이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그의 '최면 능력'은 정신 질환의 일종일 뿐 살인을 목적으로 한 고의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피해자들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은 최면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지병에 의한 우연한 사고였을 가능성을 끈질기게 제기하며 검찰의 주장을 반박했다.
"피고인은 어린 시절부터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보여왔으며, 이는 의학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습니다. 그의 '최면'이라는 특이한 능력은 정신 질환의 발현일 뿐, 살인을 목적으로 한 고의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피해자들의 사망 역시, 피고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발생한 불행한 사고일 뿐입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지 못했으며, 피해자들의 죽음은 그의 의지가 아닌, 병세로 인한 비극입니다. 우리는 피고인의 치료를 통해 사회에 복귀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무분별한 혐오와 오해로 한 병자를 사지로 몰아넣어서는 안 됩니다. 법은 맹목적인 복수가 아닌, 진정한 치유와 교화를 지향해야 합니다."
변호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차민준을 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교묘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재판장의 분위기는 술렁거렸다. 최면 살인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에 대해 판사와 배심원들 모두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증거로 제출된 최면 기기는 단순히 주파수를 발생시키는 기계일 뿐이었고, 정신 지배에 대한 차민준의 연구 노트 역시 '이론'일 뿐 '현실 범행의 증거'로 인정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언론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재판은 점차 차민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김도윤은 법정에서 차민준의 변론을 듣고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녀석은 여전히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법정마저 기만하려 들고 있었다. 그의 변론 뒤에 숨겨진 차민준의 진짜 의도가 김도윤의 뇌리에 차가운 칼날처럼 박혔다. 김도윤의 뇌리에는 차민준의 잔류 사념이 다시금 강렬하게 맴돌았다.
'나는 무죄다… 나는 병자일 뿐이다… 이 어리석은 인간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너희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다… 감히 나를 심판하려 들다니… 너희 법은 나를 잡을 수 없어….'
차민준의 사념은 그의 변론처럼 교활하고 비열했다. 김도윤은 그 사념 속에서 차민준이 과거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법망을 피해 갔던 전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몇 년 전, 차민준이 연루되었던 또 다른 의문의 사망 사건. 당시에도 그는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풀려났었다. 그때도 피해자들은 알 수 없는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범인은 사라졌다. 그 사건의 피해자들의 잔류 사념이 김도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의 고통과 함께 '심판해달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김도윤을 옥죄었다. 그들의 절규는 법정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김도윤의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마치 그들의 한이 김도윤의 정신을 잠식하는 듯했다.
김도윤은 법정에서 증거로 제출된 차민준의 휴대용 최면 기기와 연구 노트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피해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잔류 사념의 원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차민준의 '고의성'을 명확하게 입증하기 어려웠다. 최면 살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법적으로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선 정신과 의사들조차 차민준의 정신 상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초능력'에 가까운 현상을 법정에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김도윤은 답답함에 목이 메었다.
"김 검사, 피고인의 변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의 고의성을 명확히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입니다. 최면이라는 비과학적인 현상을 살인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 우리는 명확한 증거와 법리적 근거 없이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습니다."
재판장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김도윤은 자신의 능력을 법정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했다. 잔류 사념을 통해 얻은 정보는 법적 증거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차민준의 잔류 사념이 뿜어져 나오는 최면 기기를 향해 뻗어갔지만, 이내 멈췄다. 법정에서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곧 자신의 파멸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순간, 검사로서의 모든 삶이 끝장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김도윤은 오피스텔에서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그의 머릿속은 피해자들의 잔류 사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극심한 고통, 공포,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절규가 그의 뇌리를 강렬하게 맴돌았다. 마치 그들이 김도윤의 정신 속으로 들어와 함께 고통받는 듯했다. 그의 시야는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차가운 땀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심판해달라… 이 악마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 우리는 억울하다… 법은 우리를 버렸다… 당신만이 희망이다….'
그들의 무언의 메시지는 김도윤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눈앞에는 한울 정신재활원의 피해자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들의 눈은 원망과 함께 김도윤에게 '정의'를 갈구하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그를 잠식하려 들었다.
김도윤은 자신의 능력이 법의 한계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잡은 범인이 법의 굴레를 이용해 다시 풀려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의 과거, 즉 부모님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그로 인해 그에게 발현된 능력. 그는 그때도 법이 자신의 부모님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같은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다시 한번 '처단'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법의 심판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가? 비질란테로서의 역할이 다시금 그를 유혹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법과 정의, 그리고 개인적인 복수심이 뒤섞여 아우성쳤다.
"유하준 씨… 차민준 녀석이 풀려날 것 같습니다. 법이 녀석을 심판하지 못한다면… 제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저는 그들의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저는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김도윤은 유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고, 그 안에는 위험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이미 그의 정신은 비정상적인 상태였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목소리에서 그의 위험한 생각을 읽었다. 그는 김도윤이 최면적 사념의 후유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 검사님! 진정하십시오! 당신의 능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더 이상 무리하면 당신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될 겁니다. 범인의 최면적 사념이 당신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재혁 경감의 감시도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비질란테 활동을 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겁니다. 범
인도 잡았는데, 당신마저 법의 심판을 받으면 누가 이 사건의 진실을 믿어주겠습니까?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의 진실된 정의가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유하준은 김도윤을 말리려 애썼다. 그는 김도윤의 능력이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와 강재혁의 집요한 추격을 모두 고려해야 했다. 그의 목소리에도 초조함이 역력했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생명과 그의 정의가 모두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도윤의 귀에는 유하준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는 오직 피해자들의 잔류 사념만이 가득했다. 그들의 고통은 김도윤의 고통이 되었고, 그들의 절규는 김도윤의 분노가 되었다. 그의 시야는 붉게 물들었고, 눈앞에는 차민준의 비열한 웃음이 아른거렸다. 그는 자신의 이성이 점점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심판해달라… 심판해달라… 법은 우리를 외면했다… 당신만이 희망이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마라….'
그는 다시 한번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법의 한계 앞에서, 김도윤은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고뇌에 빠졌다. 그는 과연 법의 굴레 안에서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시 한번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직접 심판을 내릴 것인가? 그의 선택은 그의 운명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정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터였다.
그 순간, 김도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강재혁 경감이었다. 김도윤은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김 검사, 밤늦게 미안하네.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자네가 제출한 증거와 진술만으로는 차민준의 유죄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게 수뇌부의 판단일세. 우리는 이 사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예정이야. 그리고 자네는… 잠시 수사에서 손을 떼는 게 좋을 것 같군. 과로로 인한 건강 문제도 있고, 수사 방식에 대한 논란도 있으니. 이건 자네를 위한 조치일세."
강재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김도윤의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한 미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김도윤의 능력을 간파하고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는 경고였다. 강재혁은 김도윤의 위험한 행동을 막기 위해, 그를 수사에서 배제하려는 자신만의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김도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뇌부의 판단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을 수사에서 배제하려는 강재혁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은 김도윤의 '비질란테' 활동을 막으려는 시도이자,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경고였다. 강재혁의 침묵 속에는 "더 이상 선을 넘지 마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강재혁과의 통화는 김도윤의 결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법은 결국 차민준 같은 악마를 풀어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블랙 스크린' 사건 당시 그가 사용했던, 그리고 다시는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작은 칼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비질란테로서 활동할 때 사용했던 유일한 '도구'였다. 그의 손가락이 차가운 칼날을 스쳤다. 망설임과 결의가 그의 얼굴에 교차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마치 그의 내면의 갈등을 반영하는 듯했다. 강재혁 경감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옥죄고 있었지만, 지금 김도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끝내고, 악마를 심판하는 것. 법이 할 수 없다면, 자신이 해야 했다. 그의 능력은 그에게 그런 책임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정의를 실현해야만 했다.
김도윤은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그의 정신은 이미 만신창이였지만,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마지막 싸움에 임할 각오를 다졌다. 법의 굴레 안에
서 정의를 찾지 못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 굴레를 벗어날 터였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그리고 결연하게 빛났다. 과연 그는 이 위험한 선택을 실행에 옮길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