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은신처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김도윤의 눈은 유하준의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면에는 이영호 사건 현장의 상세한 사진과 유하준이 분석한 모방범의 흔적들이 떠 있었다. 철자 오류, 메시지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단서인 구치소 죄수복 섬유 조각. 김도윤은 모든 정보를 조용히 흡수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확실해, 하준아. 이건 내가 아니야. 하지만… 그는 나를 알고 있어.”
김도윤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속에는 명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모방범은 단순한 비질란테 추종자가 아니었다. 그는 비질란테의 행동 방식뿐만 아니라, 김도윤의 능력과 그 부작용까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전자기기 교란 현상 없이 차민준을 죽이고, 자신의 활동이 중단된 시기를 노려 이영호를 처단했다. 이는 김도윤이 외부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그 틈을 노려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하려 한 의도적인 행동처럼 보였다.
“그는 나를 모방하는 동시에, 나의 공백을 이용하고 있어. 어쩌면… 내가 처리했던 범죄자들과 연관된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또 다른 빌런일 수도 있어.”
김도윤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모방범의 존재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넘어, 사회에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불씨였다. 그의 행동이 무고한 희생자를 낳거나, 혹은 '비질란테'라는 이름 자체가 증오와 폭력의 상징으로 변질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이 거대한 파장을 멈춰 세워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야만 했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굳건한 표정을 읽었다. 그는 김도윤의 손을 붙잡았다. 며칠 전 잔류 사념의 역류로 고통스러워하던 형의 모습이 생생했다. 온몸이 경련하고, 정신을 놓을 듯 몸부림치던 모습. 그런 김도윤이 다시 능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생각에 유하준의 심장이 철렁했다.
“형! 안 돼요! 지금 형의 몸 상태로는 너무 위험해요! 아직 고열도 완전히 잡히지 않았고, 지난번 후유증이 너무 심했잖아요. 또다시 잔류 사념이 역류하면… 형의 정신이 정말 잠식될 수도 있어요!”
유하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김도윤이 자신을 구해주고, 정의를 위해 싸워온 것을 존경했지만, 그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김도윤의 희생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손을 더 강하게 잡으며 그를 말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형이 또 아프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발….”
김도윤은 유하준의 떨리는 손을 느꼈다. 녀석의 진심 어린 걱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유하준은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를 걱정시키는 것이 김도윤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듯한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미안하다, 하준아. 하지만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내가 시작한 일이고, 내가 끝내야 해. 내가 아니면 이 모방범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몰라.”
김도윤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만약 이 모방범이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거나, 혹은 더 큰 범죄를 저지른다면? 비질란테라는 이름이 피와 혼란의 상징이 된다면… 그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어. 나는 그걸 막아야 해.”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사회에 더 큰 혼란이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록 자신의 몸과 정신이 다시 망가질지라도, 그는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양심이, 그의 정의감이 그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김도윤은 이영호 사건의 세부 사항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유하준이 분석한 내용 외에도, 언론에 보도된 모든 정보를 취합했다. 범행 현장, 시신의 상태, 남겨진 메시지, 그리고 주변 CCTV에 찍힌 희미한 움직임까지. 그는 모방범의 행적에서 '잔류 사념'을 읽어내야만 했다. 자신의 능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극도로 미세한 흔적을 찾아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모방범은 아마 이영호의 뒤를 꽤 오랫동안 쫓았을 거야. 아니면, 구치소 내부에서 이영호의 정보를 얻었거나.” 김도윤은 중얼거렸다. “이영호는 출소 후 바로 은신처로 숨어들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모방범은 이영호의 출소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유하준은 김도윤의 옆에서 노트북을 조작하며 그의 분석을 도왔다. “네, 형. 이영호의 출소 정보는 극비였지만, 일부 교도관들에게는 알려졌을 거예요. 그리고… 이영호는 출소 후 바로 특정 지역으로 잠적했다고 합니다. 모방범은 어떻게 그 위치를 알아냈을까요?”
김도윤의 눈이 순간 빛났다. “정보원. 혹은… 시스템을 해킹해서 이영호의 정보를 빼돌렸거나. 둘 중 하나야. 만약 해킹이라면, 하준아, 네가 알아낼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야. 혹시 그 시간대에 구치소나 교정본부 전산망에 비정상적인 접근 기록은 없었어?”
유하준은 즉시 해당 시간대의 구치소 및 교정본부 전산망 접근 기록을 조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도윤의 지시에 따라 광범위한 데이터 속에서 미세한 이상 징후를 찾아내려 애썼다. 김도윤은 자신의 능력으로 과거를 읽어내듯이, 유하준은 데이터 속에서 숨겨진 패턴을 읽어내는 천재였다. 두 사람의 능력은 서로를 보완하며 시너지를 냈다.
“형… 여기… 비정상적인 접근 기록이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영호의 개인 정보와 출소 후 잠적지 정보가 열람된 흔적이 있어요. 발신지는…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우회되어 있지만, 패턴이 일반적인 해킹과는 좀 다릅니다.”
유하준의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감이 묻어났다. 김도윤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이영호의 잔류 사념을 읽어내려는 듯 집중했다. 며칠 전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떠올랐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잔류 사념을 읽어내는 것은 그의 능력의 핵심이었고, 이번에는 그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이영호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차가운 액정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희미한 잔류 사념의 파동이 그의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너무나 희미하고, 너무나 약해서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능력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고통은 없었지만,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미미했다.
‘제길….’
김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좀 더 강력하게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정신과 육체의 더 큰 대가를 의미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유하준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외면했다. 그는 이 비정상적인 파장을 멈추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형… 정말 괜찮겠어요?”
유하준은 불안한 눈빛으로 김도윤을 바라봤다. 김도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사용해야 할 능력이야. 지금이 적기야.”
김도윤은 자리에 앉아 이영호의 사진과 관련 자료들을 펼쳤다. 그리고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자신의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의 눈은 서서히 빛을 잃고 텅 비어가는 듯했다. 집중할수록 그의 몸은 점차 차가워졌고, 주변의 소리가 희미해졌다. 그의 정신은 이영호의 잔류 사념, 그를 죽인 모방범의 잔류 사념이 뒤섞인 혼란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강렬한 섬광이 그의 시야를 덮쳤다. 거대한 파도가 그를 덮치듯이, 이영호의 마지막 공포와 모방범의 뒤틀린 의지가 그의 정신을 강타했다. 끔찍한 비명 소리가 귓가를 찢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잔류 사념은 과거의 장면들을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처럼 생생하게 구현해냈다.
그는 이영호의 시점에서 죽음의 순간을 경험했다. 암전된 방 안, 갑자기 덮쳐오는 그림자. 강렬한 공포와 함께 목이 졸리는 고통. 그리고 그 그림자의 손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쾌감. 하지만 모방범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흐릿한 실루엣과 강렬한 분노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잔류 사념이 느껴졌다. 이영호의 과거. 그가 저질렀던 끔찍한 범죄의 순간들. 어린 피해자들의 절규.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김도윤의 정신을 난도질했다. 그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입술은 파랗게 질렸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상태를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형의 몸이 심하게 떨리고,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김도윤에게 손을 뻗었지만, 차마 만질 수 없었다. 지난번 잔류 사념 역류 때의 참혹함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김도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발만 동동 굴렀다.
김도윤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잔류 사념의 혼란 속에서 그는 작은 단서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모방범의 미세한 움직임, 그의 생각, 그리고 그의 주변에 남아있는 희미한 흔적들. 강렬한 통증 속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판… 부족해… 더 많은….’
그것은 모방범의 생각이었다. 그는 단순히 이영호를 처단한 것에 만족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더 많은 악인들을 단죄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는 김도윤과 비슷한 종류의 분노와 정의감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뭔가 뒤틀리고 삐뚤어진 욕망이 존재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미지. 모방범의 손에 들린 낡은 라이터.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새겨진 작은 문신. 날카로운 칼날 모양의 문신이었다. 흐릿했지만, 김도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커헉…!”
김도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의식을 되찾았다. 그의 몸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유하준은 비명을 지르며 김도윤에게 달려갔다.
“형! 형 괜찮아요?!”
유하준은 김도윤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김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떨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공포가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뭔가 확신에 찬 빛이 돌았다.
“찾았어… 하준아….”
김도윤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는 희미한 승리감이 담겨 있었다.
“모방범은… 칼날 문신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낡은 문양이 새겨진 라이터를 가지고 다녀. 그리고… 그는 과거에 구치소에 있었어. 이영호의 정보를 빼돌린 방식도 단순한 해킹이 아니었어. 교도관의 계정을 이용한 거야. 그리고… 그는… 나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나를 능가하려 하고 있어. 그는… 더 많은 악인들을… 더 잔인하게 처단할 거야.”
김도윤은 유하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잡는 힘은 강했다.
“이 모든 게… 내가 시작한 거야. 이제 내가 멈춰야 해. 그가 더 큰 혼란을 일으키기 전에.”
유하준은 김도윤의 말을 들으며 경악했다. 모방범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였다. 그는 형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지만, 김도윤의 눈에 서린 결의를 보며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도 비장함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형. 제가 형을 도울게요. 그 칼날 문신, 그리고 낡은 라이터… 모든 정보를 총동원해서 모방범을 찾아낼게요. 형은… 형은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유하준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그의 손은 빠르게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모방범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생기자, 그의 수사망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교도관들의 인적 사항, 과거 범죄 기록, 그리고 수상한 문신이나 특이한 소지품에 대한 정보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김도윤은 침대에 기댄 채 유하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지만, 그는 이제 쉬어갈 수 없었다. 자신이 불러온 파장을 멈추기 위해, 그는 다시 한번 어둠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능력은 그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에게 이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주었다. 이 싸움은 자신과 모방범, 그리고 법과 정의 사이의 거대한 대결이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