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VIP 룸의 악몽
"후우, 후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는 미로 같은 달동네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땀범벅에 흙투성이인 남녀. 누가 봐도 수상한 꼴이었다.
"아저씨, 그냥 강남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수진이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뒷좌석에 널브러져 진통제 통을 흔들었다. 달그락. 비어 있었다.
"젠장."
빈 통을 구겨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수준을 넘어, 뇌가 팽창했다 수축했다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아까 김 실장 그 새끼의 눈빛. 그리고 10년 전 박태산의 기억. 그 두 가지가 섞여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괜찮아?"
수진이 손수건으로 내 이마의 땀을 닦아줬다.
"어. 약 좀 사야겠어. 센 걸로."
"약국 들를 시간 없어. 놈들이 우리 위치 파악했을 거야. 바로 움직여야 해."
수진이 노트북을 열었다.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도 그녀의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박태산의 동선. 공식 일정은 다 끝났어. 그럼 놈이 스트레스 풀러 가는 곳이 있겠지."
"집 아니야?"
"집은 너무 공개돼 있어.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고. 놈이 '취미 생활'을 즐길 만한 은밀한 공간……."
수진이 지도를 띄웠다. 강남 청담동 한복판.
"여기야. '클럽 엘리시움'."
"클럽?"
"표면적으로는 VVIP 회원제 사교 클럽이야. 근데 실소유주가 태산건설 자회사야. 박태산이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들른다는 첩보가 있어."
엘리시움(Elysium). 죽은 영웅들이 간다는 천국. 이름 한번 역겹게 잘 지었다. 살인마가 쉬는 천국이라니.
"가자. 거기로."
"위험해. 김 실장이 거기 있을 수도 있어."
"있으라고 해. 오늘 끝장을 볼 거니까."
나는 주머니 속의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두렵다. 솔직히 미치도록 두렵다. 다시 그 끔찍한 기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하지만 멈출 수 없다. 10년 전, 아들을 잃은 노인의 눈빛을 봐버렸으니까.
클럽 엘리시움의 뒷골목. 자정이 넘은 시각, 화려한 슈퍼카들이 줄지어 들어거고 있었다. 입구에는 덩치 큰 가드들이 버티고 서서 출입을 통제했다.
"초대장 없으시면 입장 불가합니다."
가드가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씩 웃으며 품에서 경찰 신분증을 꺼내려다 멈췄다. 아, 나 정직 당했지. 그리고 여기는 법보다 돈이 위에 있는 곳이다. 영장 없는 경찰 따위는 씨알도 안 먹힌다.
"잠시만요."
나는 가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친한 친구처럼.
"이거 놓으시죠."
가드가 내 손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잉-
맨살이 닿았다. 역겨운 냄새. 땀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인 가드의 기억이 밀려왔다.
VIP 출입 코드 4885. 어제 룸 3번에서 나온 여자,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지. 매니저가 뒤처리하느라 고생 좀 했어. 오늘 박 의원님 오신다니까 조심해야 해. 기분 안 좋아 보이시던데.
"크윽……."
짧은 접촉이었지만 머리가 띵했다. 하지만 필요한 정보는 얻었다. 오늘 박태산이 왔다. 그리고 비밀번호는 4885.
"뭐 하는 거야, 지금!"
가드가 인상을 구기며 나를 밀쳤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술이 좀 취해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나는 비틀거리는 척하며 뒤로 물러났다. 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뭐 해? 안 들어가고."
"정문은 안 돼. 개가 지키고 있어서."
나는 수진을 데리고 건물 뒤편으로 갔다. 직원 전용 출입구. 도어락이 잠겨 있었다.
"4... 8... 8... 5..."
띠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떻게 알았어?"
"말했잖아. 문지기 머릿속에 다 있다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어두웠고, 쿵쿵거리는 베이스 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지하 1층은 스테이지, 2층은 룸. 그리고 박태산이 있는 곳은 3층. VVIP 전용 구역이다.
"올라가자."
계단에는 CCTV가 없었다. 놈들은 자신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기록되는 걸 싫어하니까. 3층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긴 복도 양옆으로 육중한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Room King. Room Queen. Room Joker.
"어디야?"
수진이 속삭였다. 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난다. 피 냄새? 아니. 와인 냄새. 그리고 포르말린 냄새.
"저기."
복도 끝, 아무런 팻말도 없는 검은 문. 가장 깊숙하고, 가장 은밀한 곳.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을 필요가 없겠지. 여기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박태산과 그의 그림자들뿐이니까.
도어락은 없었다. 대신 지문 인식기가 달려 있었다. 이건 뚫을 수 없다.
"어쩌지?"
수진이 난감해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 그리고 복도에 놓인 장식용 라이터.
"수진아. 불 좀 지르자."
"뭐? 미쳤어?"
"작게. 아주 작게."
나는 라이터를 켜서 스프링클러 센서에 갖다 댔다. 3초, 4초, 5초.
따르릉-! 따르릉-!
화재 경보기가 울렸다. 동시에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솨아아아-.
"뭐야! 불이야?" "대피해!"
아래층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문의 잠금장치가 '철컥' 하고 풀렸다. 화재 시 자동 개방 시스템. 고급 건물일수록 안전 규정은 철저하니까.
"들어가!"
우리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뚫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은 밖의 소란과는 딴세상이었다. 완벽한 방음.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와 대리석 테이블.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와인 장식장.
"박태산은?"
"도망갔거나, 아직 안 왔거나."
나는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을 살폈다. 겉보기엔 평범한 룸살롱 VIP 룸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테이블 위에 남은 잔상들이.
장갑을 벗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걸 만지면, 나는 또다시 지옥을 봐야 한다. 하지만 확인해야 한다. 여기가 놈의 도살장인지.
나는 천천히 대리석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댔다.
쿠구구구-
천둥소리.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비명. 여자의 비명. 옷이 찢겨나간다. 박태산이 소파에 앉아 있다. 한 손에는 와인 잔, 한 손에는…… 펜치. '소리 지르지 마. 노래라고 생각해.' 뚝. 손가락이 잘린다. 피가 튀어 와인 잔에 들어간다. 박태산이 그 피 섞인 와인을 마신다. '음, 빈티지가 좋네.'
"우웨엑!"
나는 바닥에 쓰러져 헛구역질을 했다. 위액이 넘어왔다. 너무 생생하다. 마치 내가 그 펜치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박태산의 광기가, 그 역겨운 쾌감이 내 뇌를 강간하고 있었다.
"도윤아! 강도윤! 정신 차려!"
수진이 내 뺨을 때렸다. 찰싹. 정신이 들었다.
"하아, 하아…… 여기야. 여기가 맞아."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와인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저기…… 저 뒤에 뭔가 있어."
기억 속에서 박태산은 항상 와인을 꺼낼 때 장식장 특정 부분을 눌렀다. 세 번째 칸, 다섯 번째 병.
나는 그 병을 잡고 옆으로 밀었다. 끼익-. 장식장이 회전문처럼 돌아갔다.
"세상에……."
수진이 입을 틀어막았다. 숨겨진 공간. 그곳은 작은 와인 셀러였다. 하지만 진열된 것은 판매용 와인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투명한 유리병. 그 안에 담긴 맑은 액체. 그리고 그 속에 떠 있는 하얀 손가락들.
병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2014. Kim Min-seok] [2015. Lee Ji-eun] [2018. Park So-young] ... [2024. The Riverside]
한강 변에서 발견된 피해자. 이름도 없이 '강변(Riverside)'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친 새끼……."
이건 단순한 살인이 아니다. 인간을 와인처럼 빈티지별로 수집하고 있었다. 가장 최근의 병, [2024. The Riverside] 옆에 빈 병이 하나 더 있었다.
[Next. Detective Kang]
"……!"
내 이름이다. 강 형사. 놈은 나를 다음 수집품으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함정이야."
수진이 소리쳤다.
"뭐?"
"이 라벨, 잉크가 아직 안 말랐어. 방금 쓴 거야. 우리가 올 줄 알고……."
그때였다.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우리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회전 문이 닫히고, 그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인자한 미소. TV에서 보던 그 얼굴. 하지만 눈만은 차갑게 죽어 있는.
박태산이었다.
"어서 와요, 강 형사님. 그리고 이 경위님."
그의 곁에는 김 실장과 덩치 큰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 김 실장의 손에는 낯익은 펜치가 들려 있었다.
"초대장은 없지만, 특별히 모시겠습니다. 내 컬렉션을 감상해 줄 관객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박태산이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내 10년의 역사를 본 소감이 어떤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도망칠 곳은 없다. 밀폐된 방. 무장한 경호원들. 그리고 내 뇌를 파먹는 두통.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차분해졌다. 드디어 만났다. 내 머릿속을 짓밟고 다니던 그 개자식을.
"소감?"
나는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웃었다. 아마 내 표정이 놈보다 더 악마 같았을 것이다.
"빈티지가 구리네. 썩은 내가 진동을 해서."
박태산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네 그 컬렉션, 오늘부로 폐업이야."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무기는 없다. 가진 건 오직 하나. 놈이 방금 마신 와인 잔, 놈이 만진 펜치, 놈이 밟고 있는 이 바닥. 이 모든 것에 놈의 죄악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뿐.
"죽여."
박태산이 짧게 명령했다. 김 실장이 펜치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수진을 내 뒤로 밀었다.
"수진아, 기억해."
"뭐?"
"내가 지금부터 뭘 하든, 절대 눈 감지 마."
나는 장갑을 벗어 던졌다. 맨손. 이제부터 닿는 모든 것이 내 무기다. 고통? 상관없다. 놈의 고통을 놈에게 돌려줄 수만 있다면, 내 뇌가 녹아내려도 좋다.
"와라, 이 기생충 새끼들아."
나는 달려드는 김 실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VIP 룸의 악몽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