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꼬리 자르기
"죽여."
박태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김 실장이 펜치를 쥔 채 달려들었다. 놈의 목표는 내 목이었다. 정확히는 경동맥. 한 번에 끊어 숨통을 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 미친……!"
김 실장이 당황하며 팔을 휘둘렀다. 나는 놈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맨살이다. 땀에 젖은, 살기 등등한 근육 덩어리.
콰지직-
뇌가 튀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놈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특수부대 복무 시절. 칼을 쓰는 법. 사람의 관절을 꺾는 각도. 오른쪽으로 페이크를 주고 왼쪽 옆구리를 찌른다.
놈의 다음 동작이 보였다. 미래 예지가 아니다. 놈의 몸에 배어 있는 습관, 수천 번 반복해서 만들어진 '살인 기술'의 기억이다.
'오른쪽 페이크, 왼쪽 찌르기.'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휘익! 놈의 주먹이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 실장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다 보인다고 했잖아, 개새끼야!"
나는 놈의 팔을 잡은 채 그대로 박치기를 날렸다. 쾅! 내 이마와 놈의 코가 충돌했다.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 내 머리도 깨질 것 같았지만, 놈의 고통이 더 컸다.
"으아악!"
김 실장이 코를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뒤에 있던 경호원 두 명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강도윤! 뒤!"
수진이 소리치며 와인병을 던졌다. 챙그랑! 한 놈의 머리 위에서 와인병이 깨졌다. 붉은 액체가 피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틈을 타 나는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스프링클러에서는 여전히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닥은 물바다, 테이블은 유리 조각 천지. 미끄럽고, 위험하고, 혼란스러웠다. 딱 내가 좋아하는 개싸움 판이다.
"잡아! 다리를 부러뜨려!"
경호원 하나가 내 발목을 잡으려 했다. 나는 놈의 손을 피하지 않고 밟아버렸다.
"아악!"
발바닥을 통해 놈의 비명이 전해졌다. 단순한 통증이 아니다. 놈이 어릴 때 개에게 물렸던 기억, 첫사랑에게 차였던 기억, 어제 먹은 점심 메뉴까지. TMI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우욱……."
속이 뒤집혔다. 전투 중에 남의 찌질한 기억이나 보고 있어야 한다니. 하지만 그 덕분에 놈이 중심을 잃는 찰나를 포착했다. 나는 놈의 얼굴을 무릎으로 가격했다.
퍽. 놈이 나가떨어졌다.
"호오."
박태산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이 난장판 속에서도 와인 잔을 들고 여유롭게 서 있었다. 마치 콜로세움의 황제처럼.
"제법인데? 형사 나부랭이가 아니라 싸움꾼이었군."
"구경만 하지 말고 너도 덤벼, 이 쫄보 새끼야!"
나는 헐떡이며 소리쳤다. 눈앞이 붉게 점멸했다. 코피가 멈추지 않아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비릿했다.
"내가 왜? 내 손에 피 묻히는 건 질색이라서."
박태산이 손짓했다. 그러자 문밖에서 대기하던 덩치들이 추가로 들어왔다. 넷, 다섯, 여섯. 좁은 VIP 룸이 검은 양복들로 가득 찼다.
'젠장.'
이건 못 이긴다. 이소룡이 와도 안 된다. 게다가 내 뇌는 이미 과부하 상태다. 한 놈만 더 만지면 혈관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수진이 내 등 뒤로 붙었다. 그녀의 손에 깨진 와인병 자루가 들려 있었다.
"도윤아, 탈출구는?"
"문은 막혔어."
"창문은?"
"여긴 3층이야. 그리고 통유리라 안 깨져."
"깨야지. 안 깨지면 죽는데."
독한 여자. 그래, 죽는 것보단 다리 하나 부러지는 게 낫다.
"김 실장, 마무리해. 시끄러워지겠어."
박태산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지루하다는 듯한 말투. 그는 룸 안쪽에 있는 비밀 문(아까 와인 셀러가 있던 곳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가긴 어딜 가!"
나는 박태산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김 실장이 다시 앞을 막아섰다. 코뼈가 주저앉아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놈은 악귀처럼 웃었다.
"어딜 감히."
놈이 품에서 삼단봉을 꺼냈다. 촤라락. 강철 봉이 펴졌다.
"이수진! 창문!"
나는 소리치며 김 실장에게 달려들었다. 놈이 삼단봉을 휘둘렀다. 나는 왼팔을 들어 막았다.
우두둑. 뼈가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극심한 고통에 눈앞이 하얘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부러진 왼팔로 놈의 목을 감아쥐었다.
"크헉!"
그리고 오른손. 장갑을 벗은 그 맨손으로 놈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지잉-
다시 한번 뇌가 끓어올랐다. 이번엔 놈의 기억이 아니다. 놈이 가지고 있는 박태산에 대한 공포. 그리고…… 놈이 숨기고 있는 비밀.
금고. 태산건설 지하 2층. 장부. 모든 살인의 기록.
보았다. 이 새끼, 박태산의 개 노릇을 하면서도 보험을 들어놨구나. 박태산의 약점을 쥔 비밀 장부를 숨겨두고 있었어.
"고맙다, 개새끼야."
나는 놈의 눈을 찌르듯 밀어내며 낭심을 걷어찼다. 치명타다. 아무리 특수부대 출신이라도 거기는 단련 못 한다.
김 실장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나는 그 틈을 타 와인 셀러로 뛰었다.
"막아! 저 새끼 막아!"
경호원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늦었다. 나는 와인 셀러 안에 손을 뻗었다. 아무거나. 아무거나 하나만 잡히면 된다.
내 손끝에 차가운 유리병이 닿았다. [2024. The Riverside]. 한강 사건 피해자의 손가락이 담긴 병.
"잡았다."
나는 병을 품에 안고 구르며 경호원의 발길질을 피했다.
쨍그랑! 콰앙!
반대편에서 엄청난 파열음이 들렸다. 수진이었다. 그녀가 무거운 대리석 보조 테이블을 들어 통유리창에 던진 것이다. 강화유리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도윤아! 지금이야!"
수진이 소리쳤다. 나는 병을 사수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것들 잡아! 병 뺏어!"
박태산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컬렉션이 밖으로 나가는 건 용납할 수 없겠지.
"미안하지만, 이건 압수품이다."
나는 달려드는 경호원에게 침을 뱉고, 창문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수진이 먼저 금 간 유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와장창! 유리 파편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밤하늘이 열렸다.
나도 뒤따라 뛰었다. 등 뒤에서 김 실장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죽여버릴 거야!!!"
몸이 허공에 붕 떴다. 3층 높이. 아래는 화단이었다. 하지만 푹신할 리 없다.
"으아아아!"
중력에 몸을 맡긴 짧은 순간, 서울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충격.
쿠당탕!
화단의 관목 위로 떨어졌다. 나뭇가지들이 온몸을 긁고 찔렀다. 왼팔의 통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크헉…… 쿨럭!"
입에서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살았나? 다리를 움직여봤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은 것 같다. 품을 확인했다. 유리병. 멀쩡하다. 내 갈비뼈가 쿠션 역할을 해준 덕분이다.
"도윤아, 일어나!"
수진이 나를 부축했다. 그녀도 얼굴과 팔이 긁혀 피투성이였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놈들이 내려올 거야. 뛰어야 해."
위쪽 창문에서 경호원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전기로 뭔가 소리치는 게 보였다.
우리는 절뚝거리며 골목길을 달렸다. 비는 그쳤지만, 바닥은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 차 어디 있어."
"저기, 편의점 앞."
우리가 타고 온 SUV가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클럽 주차장에서 검은색 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보였다.
끼익-! 끼이익!
타이어 타는 냄새. 놈들이다.
"빨리 타!"
수진이 운전석에 뛰어올랐다. 나도 조수석에 몸을 던져 넣었다. 문을 닫자마자 밴 한 대가 우리 차 옆을 들이받았다.
쾅!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내 머리가 창문에 부딪혔다.
"꽉 잡아!"
수진이 기어를 넣고 엑셀을 끝까지 밟았다. 부아앙!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차가 튀어 나갔다. 놈들의 밴을 밀어붙이며 도로로 진입했다.
"따돌려! 강변북로로!"
"알았어! 근데 너 괜찮아? 피가 너무 많이 나!"
"신경 쓰지 마…… 운전이나 해."
나는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허벅지를 꼬집었다. 룸미러를 보니 밴 두 대가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놈들은 신호도 무시하고 달렸다. 이 도심 한복판에서 레이싱이라니. 박태산의 권력이 대단하긴 하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저것들 끈질기네."
수진이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차가 휘청하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아는 곳. 놈들이 절대 못 들어오는 곳."
수진은 익숙하게 골목을 누볐다. 그리고 10분 뒤. 우리는 어느 낡은 모텔 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웠다. 주변에는 '임대 문의'가 붙은 폐건물들이 즐비했다. 재개발 예정지. 유령 도시 같은 곳이었다.
"……여기면 못 찾을 거야."
수진이 핸들에 고개를 파묻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쫓아오던 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따돌린 것 같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살았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악마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서 나왔다.
나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하얀 손가락. 그리고 [2024. The Riverside]라는 라벨.
"이거야."
내가 병을 흔들어 보였다.
"놈의 목줄."
수진이 고개를 들고 병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안도감, 그리고 공포가 섞인 눈물이었다.
"우리……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나는 욱신거리는 왼팔을 부여잡으며 씩 웃었다. 코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려 셔츠를 붉게 물들였다.
"이거 가지고 가서, 검사 결과 나오면 판 뒤엎어야지."
"근데 도윤아."
수진이 내 얼굴을 만졌다. 차가웠다.
"너 눈이……."
"왜? 잘생겼냐?"
"아니, 빨개. 흰자위가 하나도 안 보여. 온통 핏빛이야."
그제야 알았다. 내 시야가 붉은 게 조명 탓이 아니었다는 걸.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버린 거다. 뇌에 과부하가 걸린 대가.
"상관없어."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보이는 건 다 봤으니까."
김 실장의 기억 속 금고. 박태산의 와인 셀러. 그리고 10년 전의 진실.
이제 맞출 퍼즐 조각은 다 모였다. 남은 건 하나. 그 퍼즐을 박태산의 면상에 던져버리는 것뿐.
"조금만…… 잘게. 깨우지 마라."
"도윤아? 야! 강도윤!"
수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암흑. 하지만 이번엔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꿈속에서라도 놈을 죽이는 꿈을 꿀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