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목격자(7장)

by BlackBearLeo

7장. 두 번째 목격자

"……안 보여."

눈을 떴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아니,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핏빛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흐릿했다. 마치 눈알에 빨간 셀로판지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도윤아? 정신이 들어?"

옆에서 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릿한 실루엣이 내 얼굴 위로 다가왔다. 차가운 물수건이 이마에 닿았다.

"지금 몇 시야?"

"오후 2시. 꼬박 14시간을 잤어."

14시간. 그동안 박태산은 뭘 했을까. 아마 서울 바닥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겠지.

"내 눈…… 왜 이래?"

"실핏줄이 다 터졌어. 의사 말로는…… 뇌압이 너무 올라가서 시신경을 눌렀대. 일시적인 현상이라는데, 안정을 취하지 않으면 영영 안 보일 수도 있대."

수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의사라니. 병원엔 못 갔을 텐데.

"의사?"

"아는 선배한테 전화했어. 왕진 좀 와달라고. 믿을 만한 사람이야."

역시 이수진.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특히 3층에서 떨어질 때 부딪힌 왼쪽 옆구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으윽……."

"누워 있어. 뼈엔 이상 없는데 타박상이 심해."

수진이 나를 억지로 눕혔다. 모텔 방 특유의 퀴퀴한 냄새. 그리고 수진에게서 나는 은은한 화장품 냄새. 피 냄새보다는 나았다.

"그 병은?"

"잘 있어. 냉장고에 넣어뒀어."

안심이다. 그것만 있으면 된다. 그게 우리의 유일한 동아줄이니까.

"근데 도윤아."

수진이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 손가락, 부패 진행 상태로 봐선 사망 시점하고 딱 맞아떨어져."

"한강 사건 피해자 거 맞지?"

"어. 성인 여자의 새끼손가락. 절단면도 펜치로 잘린 흔적이 역력해. 네가 기억 속에서 본 그대로야."

확실하다. 박태산의 와인 셀러에서 나온 이 손가락이, 놈이 살인 현장에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다.

"DNA 검사, 맡길 수 있어?"

"이미 보냈어. 아까 왕진 온 선배 편에. 내일 아침이면 결과 나올 거야. 한강에서 발견된 시신 DNA랑 대조해 보면 빼박이겠지."

"빨라서 좋네."

나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갈비뼈가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웃음이 나와? 지금 우리 지명수배 떨어졌어."

"지명수배?"

"어. 경찰관 폭행 및 도주, 공무집행 방해, 기물 파손…… 죄목도 화려하더라. 뉴스에 네 얼굴 도배됐어. '미친 형사, 동료 폭행 후 도주'라고."

박태산답다.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리는 수법. 이제 나는 경찰이 아니라 쫓기는 범죄자가 됐다.

"오히려 좋아."

"뭐가?"

"잃을 게 없잖아. 원래 잃을 게 없는 놈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나는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붉은 안개 속에서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김 실장의 대가리를 잡았을 때 보았던 그 영상.

"수진아. 노트북 켜봐."

"왜?"

"찾아야 할 게 있어. 태산건설 구사옥."

"구사옥? 거긴 재개발 때문에 폐쇄됐을 텐데."

"거기에 있어. 두 번째 목격자가."

라면 냄새가 났다. 수진이 컵라면에 물을 부어왔다. 하루 종일 굶었더니 위장이 요동쳤다.

"먹을 수 있겠어?"

"없어서 못 먹지."

나는 젓가락을 들었지만, 시야가 흐릿해서 면발을 집기가 힘들었다. 헛손질을 몇 번 하자, 수진이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뺏어갔다.

"아, 해."

"됐어. 내가 먹어."

"흘리지 말고 그냥 받아먹어. 시간 없어."

수진이 억지로 내 입에 라면을 밀어 넣었다. 뜨겁고, 짰다. 근데 왜 이렇게 맛있냐. 눈물이 날 정도로.

"아까 말한 두 번째 목격자. 사람이 아니야."

라면을 씹으며 내가 말했다.

"그럼?"

"장부(帳簿)."

수진의 손이 멈췄다.

"김 실장, 그 새끼 생각보다 영악하더라고. 박태산 밑에서 더러운 짓 도맡아 하면서, 혹시나 토사구팽 당할까 봐 기록을 남겨뒀어."

"그게 태산건설 구사옥에 있다고?"

"어. 지하 2층, 문서고. 벽 뒤에 숨겨진 금고가 있어. 김 실장 기억 속에선 그랬어."

"그 안에 뭐가 있는데?"

"박태산이 사주한 청부 살인 리스트. 뇌물 받은 정재계 인사들 명단. 그리고…… 10년 전 사건에 대한 기록까지."

이건 핵폭탄이다. 손가락이 살인죄를 입증할 증거라면, 장부는 박태산이라는 거대한 성을 무너뜨릴 폭탄이었다. 이게 있으면 놈은 대통령은 커녕, 감옥에서 평생 썩어야 한다.

"근데 문제가 있어."

내가 물을 들이키며 말했다.

"내 눈이 이 모양이라."

"내가 갈게."

수진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안 돼. 위험해."

"너보단 내가 나아. 넌 지금 앞도 제대로 못 보잖아. 그리고 난 그 건물의 도면을 구할 수 있어."

"그래도……."

"시간이 없어. 박태산이 김 실장이 당한 걸 알면, 분명 그 장부부터 찾으려 할 거야. 놈들이 먼저 가져가면 끝이야."

맞는 말이다. 김 실장은 내 능력을 모른다. 내가 자신의 기억을 읽었다는 걸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놈도 바보가 아니다. 자신이 제압당한 시점에서 불안함을 느끼고 장부를 옮기려 할 수도 있다.

오늘 밤. 오늘 밤이 지나면 기회는 없다.

"같이 가."

내가 말했다.

"짐 된다니까."

"짐짝 취급하지 마. 눈은 좀 흐릿해도, 감각은 살아 있어. 그리고 금고 비밀번호, 내 머릿속에만 있잖아."

수진은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내 뒤에 딱 붙어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밤 11시. 비는 그쳤지만 안개가 자욱했다. 태산건설 구사옥은 강북의 재개발 구역 한복판에 흉물처럼 서 있었다. 유리창은 다 깨져 있었고, 입구에는 '출입 금지'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다.

"경비는?"

"정문이랑 후문에 각각 두 명. 그리고 순찰 도는 놈이 한 명."

수진이 망원경으로 동태를 살폈다. 내 눈엔 그저 뿌연 덩어리들만 보였다.

"전문 경호업체야. 박태산이 사옥 폐쇄하면서 경비만 남겨뒀어. 뭔가 지킬 게 있다는 뜻이지."

"들어가자. 개구멍 없어?"

"지하 주차장 환풍구. 도면상으론 거기가 문서고랑 제일 가까워."

우리는 어둠을 틈타 건물 뒤편으로 이동했다. 환풍구 덮개는 녹이 슬어 덜렁거렸다. 수진이 펜치로 철망을 끊어냈다.

"먼저 들어갈게."

수진이 날렵하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도 뒤따라 들어갔다. 좁고, 먼지가 가득했다. 기어가는 동안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10분쯤 기었을까. 수진이 멈췄다.

"여기야."

아래가 보였다. 희미한 비상등이 켜진 복도. 지하 2층이었다.

수진이 덮개를 열고 착지했다. 나도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쉿."

수진이 내 입을 막았다. 저쪽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순찰이다. 뚜벅, 뚜벅. 군화 발소리. 손전등 불빛이 벽을 훑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내 눈엔 불빛이 붉은 덩어리로 보여서 더 공포스러웠다.

경비원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3미터, 2미터.

'이런 젠장.'

들킨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반대편으로 던지려는데, 수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테이저건. 아, 챙겨 왔구나.

경비원이 기둥 옆을 지나는 순간.

파직!

"억!"

푸른 불꽃이 튀며 경비원이 바들바들 떨다가 쓰러졌다. 소음총을 맞은 것처럼 조용했다.

"나이스 샷."

내가 엄지를 치켜세우자, 수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빨리 움직여. 얘네 무전으로 주기적으로 보고할 거야."

우리는 복도를 따라 뛰었다. 김 실장의 기억 속에 있던 그 장소. 문서고.

"여기다."

철문은 잠겨 있었다. 하지만 이건 문제가 안 된다. 수진이 락픽(Lock pick) 도구를 꺼냈다.

"너 이런 것도 할 줄 아냐?"

"프로파일러는 범죄자의 심리뿐만 아니라 기술도 배워두는 법이지."

철컥. 10초도 안 돼서 문이 열렸다. 대단한 여자다. 나중에 은퇴하면 도둑질해도 먹고살겠어.

문서고 안은 거대했다. 수천 개의 서류 상자가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쌓여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건 종이 쪼가리가 아니다.

"가장 안쪽 벽. 소화전 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위치를 알려줬다. 수진이 소화전 함을 열고, 그 뒤의 패널을 뜯어냈다. 그러자 드러난 회색 금고.

"찾았다."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비밀번호는?"

나는 눈을 감았다. 김 실장의 손끝 감각을 떠올렸다. 그가 눌렀던 번호의 위치, 압력, 그리고 리듬.

"9... 4... 1... 3..."

삐- 삐- 삐- 삐-

"그리고 별표."

띠리릭-

철컹. 육중한 금고 문이 열렸다.

"열렸어!"

수진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가 금고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꺼낸 것은, 낡은 가죽 다이어리 두 권과 USB 하나였다.

"이거야?"

"어. 그게 박태산의 목줄이야."

수진이 다이어리를 펼쳤다. 전등 불빛 아래 드러난 내용들.

[2015. 4. 2. 강남구청장 뇌물 5억 전달. (녹취 파일 USB 1번 폴더)] [2017. 9. 12. 김영철 기자 처리 완료. 교통사고 위장.]

"미친……."

수진이 경악했다. 상상 이상이다. 살인, 뇌물, 협박, 횡령. 대한민국 법전의 모든 범죄가 이 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가자. 이제 끝났어."

내가 말했다. 이제 이걸 가지고 나가서 터뜨리면 된다. 대선이고 뭐고, 박태산은 끝이다.

우리는 금고를 대충 닫고 나가려 했다. 그런데.

우웅- 우웅-

건물 전체에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들켰어?"

"아까 그 경비원, 무전 보고 시간 넘긴 거 아냐?"

"젠장. 튀어!"

우리는 복도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계단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손전등 불빛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저기 있다! 잡아!"

"쏴버려!"

탕! 총소리가 들렸다. 실탄이다. 미친놈들, 서울 한복판에서 총질을 해?

"이쪽이야!"

수진이 나를 끌고 반대편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쪽은 막다른 길이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작동할 리가 없었다.

"어떡해? 포위됐어."

수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앞에는 총 든 경비원들. 뒤에는 벽. 독 안의 든 쥐 꼴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흐릿한 시야 속에 뭔가 보였다. 화물용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비상 사다리. 지하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통로다.

"저기! 사다리!"

우리는 사다리로 뛰어들었다. 탕! 탕! 총알이 벽에 박히며 콘크리트 파편이 튀었다. 왼쪽 뺨이 따끔했다. 스쳤나 보다.

"내려가!"

수진을 먼저 내려보내고 나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지하 3층. 주차장. 칠흑 같은 어둠.

"차단기 내려갔어. 아무것도 안 보여."

수진이 당황했다. 하지만 나에겐 기회였다. 어차피 난 지금 잘 안 보인다. 오히려 놈들이 안 보이는 이 어둠이 나에겐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수진아. 내 손 잡아."

"뭐?"

"난 어둠에 익숙해. 소리로 놈들 위치 파악할게. 넌 내 눈이 되어줘. 놈들 불빛이 어디 있는지 말해."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 속을 달렸다. 위층에서 놈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12시 방향, 불빛 두 개!"

수진이 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3시 방향으로 꺾었다.

"9시 방향, 셋!"

다시 6시 방향으로. 우리는 춤을 추듯, 어둠 속에서 놈들의 포위망을 피해 다녔다. 마치 눈먼 자가 안내하는 지옥도 같았다.

"저기야! 출구!"

주차장 램프가 보였다.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쪽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뛰어!"

우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 달렸다. 뒤에서 고함 소리와 발소리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쪽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비 내린 뒤의 흙 냄새. 자유의 냄새였다.

"하아, 하아……."

우리는 건물 담장을 넘어 덤불 숲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놈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우리를 찾지는 못했다.

"놓쳤습니다!" "찾아!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놈들의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우리는 숨죽이고 있었다. 수진의 심장이 내 등에 닿아 쿵쿵거리는 게 느껴졌다.

한참 뒤. 주변이 조용해졌다.

"……살았다."

수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에는 장부와 USB가 꼭 들려 있었다.

"봤지? 나 아직 쓸만하다니까."

내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쓸만하긴 개뿔. 너 아까 기둥에 머리 박을 뻔한 거 내가 당겨서 살았잖아."

"그건…… 전술적인 움직임이었어."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흙투성이에 피범벅이 된 꼴이 우스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경찰서로 가?"

수진이 물었다.

"아니. 경찰서는 이미 썩었어. 이거 가져가봤자 증거물 분실됐다면서 없애버릴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법대로 해서는 박태산을 이길 수 없다. 놈이 짠 판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다.

우리는 판을 바꿔야 한다. 놈이 절대 예상하지 못한 곳. 놈이 가장 자신만만해하는 그곳에서, 놈의 가면을 벗겨버려야 한다.

"내일 모레."

"내일 모레 뭐?"

"대선 후보 마지막 TV 토론회."

수진의 눈이 커졌다.

"거길 가겠다고? 생방송 중에?"

"어.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터뜨려야 해. 그래야 못 덮어."

위험한 도박이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박태산이 대통령이라는 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그 순간, 그 꿈을 악몽으로 바꿔주는 것. 그게 내가 놈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수다.

"준비해. 이번엔 우리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될 테니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서울의 야경이, 마치 우리를 기다리는 무대 조명처럼 보였다.

두 번째 목격자, 장부. 그리고 첫 번째 목격자, 나. 이 둘이 만나면 어떤 폭발이 일어날지, 박태산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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