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목격자(8장)

by BlackBearLeo

8장. 대선 토론의 불청객

상암동 DMC. 거대한 방송국 건물들이 마천루처럼 솟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S방송국. 오늘 밤, 이곳에서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마지막 TV 토론회가 열린다.

"사람 더럽게 많네."

나는 방송국 후문 주차장에 세워진 탑차 안에서 중얼거렸다. 방송국 주변은 각 후보 지지자들과 경찰 병력, 그리고 취재 차량들로 북새통이었다.

"준비됐어?"

운전석에 앉은 수진이 물었다. 그녀는 방송국 기술 팀 조끼를 입고, 목에는 위조된 출입증을 걸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낡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눈은 좀 어때?"

"여전해. 온 세상을 붉은 필터 끼고 보는 기분이야."

아직 시력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늘 밤 내가 봐야 할 건 딱 하나, 박태산의 무너지는 얼굴뿐이니까.

"시간 됐어. 들어가자."

수진이 장비 박스를 챙겨 들었다. 나도 무거운 조명 장비 케이스를 어깨에 멨다. 케이스 안에는 조명 대신 우리의 '무기'가 들어 있었다. 손가락이 담긴 병, 그리고 장부.

우리는 탑차에서 내려 후문으로 향했다. 보안 검색대 앞에는 경비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경비원이 우리를 막아섰다. 수진이 자연스럽게 출입증을 태그했다.

삑-

[외부 기술팀. 이수진.]

"조명 팀 보강 인원입니다. 생방송 30분 전이라 급해서요."

수진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묻어났다. 연기력이 늘었다. 경비원이 내 출입증을 확인하려 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출입증을 내밀었다.

삑-

[외부 기술팀. 강도철.]

도윤이 아니라 도철. 수진이 급하게 만든 가짜 신분이다. 경비원이 내 얼굴을 유심히 보려 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흉터.

"눈이 왜 그러십니까?"

"아, 어제 용접 작업을 좀 하다가…… 결막염이 심해서요."

나는 일부러 기침을 콜록거렸다. 경비원은 찜찜한 표정을 지었지만, 뒤에서 무전이 울리자 서둘러 손짓했다.

[빨리 들여보내! 조명 세팅 늦어지면 국장님한테 깨진다고!]

"들어가세요."

통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스튜디오는 5층. 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는 양복 입은 덩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박태산의 사설 경호팀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안 돼. 계단으로 가자."

우리는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무거운 장비를 메고 5층까지. 평소라면 식은 죽 먹기였겠지만, 지금 내 몸은 만신창이였다.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옆구리가 찢어질 듯 아팠다.

"헉, 헉……."

4층. 문틈으로 복도를 살폈다. 대기실이 있는 층이라 경비가 더 삼엄했다.

"여기서부터는 진짜야."

수진이 품에서 테이저건을 점검하며 속삭였다.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통로는 두 개야. 출연자 입구랑 스태프 통로. 출연자 쪽은 뚫기 힘들고, 스태프 통로를 노려야 해."

"거기도 지키고 있을 텐데."

"응. 그래서 네가 필요해."

수진이 내 어깨를 잡았다.

"불 끄자."

[생방송 5분 전! 스탠바이!]

스튜디오 안은 전쟁터였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방청객들은 숨죽인 채 후보자들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 중앙. 박태산은 메이크업 수정을 받고 있었다. 여유로운 미소. 완벽한 수트 핏. 그는 거울을 보며 연습했던 멘트를 중얼거렸다.

"국민의 안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없는 나라……."

그 시각, 무대 뒤편 스태프 통로.

"야, 저기 뭐야?"

복도를 지키던 경호원 두 명이 웅성거렸다. 복도 끝 배전반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파지직! 펑!

"뭐야! 불이야?"

경호원들이 달려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 나왔다.

"누구…… 억!"

나였다. 나는 달려드는 경호원의 명치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장갑을 낀 손. 능력을 쓰면 편하겠지만, 지금은 아껴야 한다. 전투용이 아니라 '확인용'으로 써야 하니까.

"한 놈 처리."

내가 쓰러진 놈을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반대편에선 수진이 다른 경호원의 뒷덜미에 테이저건을 꽂았다.

지지직-

"두 놈."

우리는 쓰러진 놈들을 비상구 계단에 던져놓고 스튜디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 너머로 웅장한 오프닝 음악이 들려왔다.

[지금부터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힘찬 목소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작했어."

수진이 시계를 봤다.

"오프닝 멘트 끝나고 각 후보 기조연설 3분씩이야. 박태산 순서는 세 번째. 약 7분 뒤."

7분. 그동안 들키지 않고 대기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다.

"거기, 뭐 하는 놈들이야?"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인이어를 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경호 팀장이었다. 김 실장 밑에 있던 놈. 놈의 눈이 내 마스크 위로 드러난 붉은 눈과 마주쳤다.

"……강도윤?"

들켰다. 놈이 무전기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 나는 장비 케이스를 집어 던졌다.

"막아!"

케이스가 놈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억 하고 뒤로 밀려나는 사이, 나는 거리를 좁혔다. 놈이 품에서 칼을 꺼냈다. 방송국 안인데 칼이라니, 미친놈들.

쉭! 칼날이 내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흐릿한 시야 탓에 거리 조절이 힘들었다. 왼쪽 어깨가 베였다. 뜨거운 통증.

"도윤아!"

수진이 도우려 했지만, 복도 양쪽에서 지원 병력이 몰려오고 있었다. 셋, 넷. 포위됐다.

"여기서 죽여. 시체는 방송 끝나고 치우면 돼."

경호 팀장이 차갑게 명령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막히면 끝이다. 저 문 하나만 열면 되는데. 바로 저기 박태산이 있는데.

그때였다.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이곳은 방송국이다. 어디에나 카메라가 있고, 어디에나 마이크가 있다.

"수진아! 오디오!"

내 외침에 수진이 즉각 반응했다. 그녀는 벽면에 붙은 스태프용 인터컴 패널을 뜯어냈다. 그리고 복잡한 전선들 중 하나를 찾아 락픽으로 긁어버렸다.

끼이이이익-!

고주파 소음. 스튜디오 안의 모든 스피커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경호원들이 귀를 막고 주춤했다. 그 틈이다.

"뚫어!"

나는 어깨의 고통을 무시하고 경호 팀장에게 돌진했다. 놈이 칼을 휘둘렀지만,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왼팔을 내주어 칼을 막고, 오른손으로 놈의 멱살을 잡아 벽에 처박았다.

쾅!

"비켜, 이 기생충들아!"

나는 놈을 밀치고 스튜디오 문을 향해 달렸다. 수진이 내 뒤를 따르며 따라오는 놈들에게 소화기를 분사했다.

푸아아악! 하얀 분말이 복도를 뒤덮었다.

스튜디오 안. 갑작스러운 오디오 사고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아, 마이크 테스트. 잠시 음향 사고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회자가 땀을 닦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그럼 계속해서 기호 1번, 박태산 후보의 기조연설을 듣겠습니다."

조명이 박태산을 비췄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 역시 괴물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최근 한강변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박태산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범인은 잡혔지만, 희생된 분의 고통은 누가 보상합니까? 저는 약속합니다. 범죄 없는 나라, 내 가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저 박태산이……."

쾅!!!

그때였다. 무대 뒤편, 스태프 출입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모든 카메라와 방청객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먼지와 연기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피 묻은 셔츠. 찢어진 마스크. 그리고 귀신처럼 붉게 충혈된 눈.

나, 강도윤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FD가 막아서려 했지만, 나는 그를 밀치고 무대 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경호원들이 뒤늦게 뛰어 들어왔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생방송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박태산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크를 끄지 않았다.

"강 형사님?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는 짐짓 걱정스러운 척, 연기를 시작했다.

"지금 지명수배 중인 걸로 아는데…… 자수하러 오셨나요?"

하, 말 한마디로 나를 범죄자로 만드네. 나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조명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병. 그 안에 담긴 하얀 손가락.

"자수가 아니라, 배달 왔습니다."

나는 병을 박태산의 발언대 위에 쾅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이거, 놓고 가셨길래."

스튜디오에 정적이 흘렀다. 카메라 감독이 당황해서 앵글을 돌리려 했지만, PD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찍어! 줌 인 해!] 시청률의 노예들. 고맙다.

"이게…… 뭡니까?"

박태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시잖아요. 의원님 컬렉션 중 하나인데."

나는 마이크를 뺏어 들었다. 전 국민이 보고 있다. 실수하면 안 된다.

"이 손가락, 3일 전 한강에서 발견된 변사체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병은, 박태산 후보의 개인 와인 셀러에서 나왔습니다."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방청객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무슨 미친 소리를! 경호원! 당장 이 사람 끌어내!"

박태산이 소리쳤다.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이 무대 위로 난입했다. 하지만 수진이 무대 아래서 장부를 흔들었다.

"이 안에 다 있어! 10년 전 동남아 실종 사건부터, 이번 사건까지! 박태산이 죽이라고 지시한 사람들 명단!"

수진의 외침이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이건 모함입니다! 공작이에요!"

박태산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공작?"

나는 경호원들에게 팔이 잡힌 채로, 박태산을 노려봤다. 내 붉은 눈이 놈의 눈동자를 뚫을 듯 응시했다.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네."

나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단상 위의 병을 가리켰다.

"그 병, 네가 직접 포장했잖아. 와인 한 모금 머금어서 뿜는 거, 네 시그니처잖아."

박태산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놈은 알고 있다. 저 병 안에 자신의 타액이, 자신의 DNA가 묻어 있다는 걸.

"저 병 안의 와인 성분 분석하면 다 나와. 네 침, 네 와인 취향까지."

"그만! 방송 꺼! 끄라고!"

박태산이 단상을 엎어버렸다. 와장창!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포르말린 용액이 무대 위로 흘러내렸고, 하얀 손가락이 덩그러니 바닥에 나뒹굴었다.

카메라는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클로즈업했다. 잘린 손가락. 그리고 그 앞에서 악귀처럼 일그러진 대선 후보의 얼굴.

"봤지?"

나는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눌리면서도 웃었다.

"저게 네 진짜 얼굴이야."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리며 무대 위로 뛰어들었고, 방청객들은 충격에 빠져 웅성거렸다. 생방송 송출 중단 자막이 떴지만, 이미 늦었다.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목격했다. 가장 화려한 조명 아래 드러난, 가장 추악한 진실을.

나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박태산을 봤다. 그는 주저앉아 떨고 있었다. 공포. 10년 동안 남들에게 심어주던 그 공포를, 이제 자신이 맛보고 있었다.

"끝났다, 박태산."

내 속삭임은 소란 속에 묻혔지만, 놈에게는 들렸을 것이다. 수갑이 채워지는 차가운 감촉이 손목에 닿았다. 하지만 기분은, 생애 최고로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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