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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성" 백설의 겨울을 걷다

계양산성 기행

"계양산성"

백설의 겨울을 걷다


이 도연


언덕마루 올라서면 또렷하게 보이는 계양산 철탑이 하늘을 찌른다. 부평의 주산인 계양산이 북풍을 막아서며 병풍처럼 도시를 아우르고 있다.

전철로 이십 분이며 갈 수 있는 계양산을 머리에 이고 살지만, 가깝고도 먼 산이라 했던가! 마음보다 자주 가지 못하는 산이다.

어제 내린 눈으로 인해 계양산 어깨에는 새하얀 눈이 무희의 투명한 드레스처럼 흘러내린다.

오랜만에 긴 설 명절의 마지막 날인지라 아쉬운 연휴를 즐기기 위해 몰려든 등산객의 모습을 쉽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좌측 장미공원 방향으로 돌아서 하느재 고개를 지나 정상으로 올라갈지 망설이다 우측 둘레길 돌아 샛별 농장 울타리를 타고 목상동 솔밭 코스로 방향을 잡는다.

전날 제법 많이 내린 눈으로 인해 북벽 쪽에는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자연은 인간의 오만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되뇌며 어쭙잖은 만용은 사고를 불러오는 법인지라 아이젠을 단단하게 발에 고정하고 산길을 걷는다.


백설이 잔잔하게 내린 솔밭을 걷는 기분이 짜릿하여 마치 티베트의 거대한 설산을 등반하는 느낌을 상상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잡목이 엉켜있는 숲길 사이를 헤치며 걸어간다.

처녀림 같은 순백의 설원 위로 바람이 나부끼면 눈발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흩날린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발자국을 남기면 누군가 뒤에서 이 길을 따라 걸어 올 테니 선각자가 따로 없다.

샛별 농장 옆으로 난 길을 걷다 시야에 들어온 작은 우물터를 발견한다. 오랜 시간 속으로 돌들이 무너져 내렸어도 2m 정도 깊이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우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오래 묵은 사연을 품고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눈과 덤불속에 묻혀 있다.

한때는 산객이나 동물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쉼터로 맑은 물이 샘솟는 청량한 우물이었을 것이다.


농장 울타리 너머로 커다란 타조 무리가 보인다. 동물원이나 아프리카 초원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타조가 지척의 눈에 보이니 신기하기만 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타조를 쳐다보자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타조는 내가 더 신기한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반짝이는 눈망울을 깜빡이며 쳐다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날개를 퍼덕거린다.

타조의 따가운 시선을 등에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바위투성이 길이 한참을 이어진다.

발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지거나 발목이 상할 수 있어 걸음은 더디고 다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다.

산의 북벽이라 눈이 많이 쌓여 있어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씨가 다정하고 온화하여 진달래 몽우리라도 터지려는 봄날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목상동 솔밭길 입구에 접어든다. 눈 밑에 잔솔가지와가 쌓여 폭신폭신하게 밟히는 부드러운 감각은 너덜길*을 거칠게 달려온 발목에 위안이 된다.

새파란 하늘로 찌를 듯이 높이 자라난 소나무는 늘씬한 처녀의 몸매처럼 쭉쭉 뻗어 아름답고 우듬지를 올려다보자 햇살에 눈이 부시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소나무 군락은 그 자체로 빙수 같은 눈과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설산풍경을 연출한다.

다리의 피로도 풀고 허기를 달랴기 위해 음료와 간식을 나누는 시간은 산행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로 주섬주섬 배낭마다 풀어 놓은 간식이 진수성찬이 따로 없으니 입맛은 천국이다.


간식을 마친 후에는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나가세요!"가 아니라 앉은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비닐봉지 하나 음식물 조각하나 앉은자리 풀포기를 일으켜 세워 놓을 정도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사계를 정리한다.

간단하게 요기를 마치고 솔밭 풍경을 배경 삼아 인증사진을 찰칵, 남기고 다시 산길로 방향을 잡는다.

솔밭 사이를 흐르는 계곡 건너 "강한 육군 통합 훈련장" 표지가 보이고 군부대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은 회색빛 회벽이 차갑게 얼어 있는 듯 보인다.

저곳에서 누군가의 아들이며 이 시대 젊은 청춘들의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겠구나! 저들이 노고가 있어 눈 덮인 설원의 꿈과 솔밭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으로 풍욕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감사의 마음이 들기도 하며 군 생활하던 옛 추억이 소환되어 철조망을 두른 건물 담장과 겹치며 감회가 새롭게 느껴진다.


이제부터 진정한 산행이 시작인가!

산행의 정점을 찍는 코스가 가파르게 시선을 막아선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경사면과 경사면으로 이어지는 피고개가 그것이다.

피가 나고 알이 배어 피고개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피고개의 전설이라도 있으려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거친 숨을 토해낸다.

평상시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실체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자기 관리에 꾸준한 사람의 발걸음은 사뿐하게 가벼운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 발걸음은 천근만근 발길을 끌고 힘겹게 토해내는 숨결은 씩씩거리는 황소처럼 거칠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길이 끊어진 곳에서 시작된다지만, 길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한참을 앞만 보며 오르다 보니 새파란 하늘이 쨍하고 빛난다.

부드러운 능선 따라 이어지는 길 좌측으로 김포평야와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건너편 하늘 아래 펼쳐진 일산 신도시의 모습이 나지막하게 보인다.

가파르게 일어선 우측 능선 위를 가로지르는 산성은 아직도 발굴과 조성이 한창이다.


계양산성은 돌을 쌓고 안쪽에 흙을 채운 토뫼식 산성으로 고산성이라고도 부른다.

계양산 해발 395m 중턱에 자리 잡은 산성으로 한강 하류 초입에 위치하여 백제, 고구려, 신라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높이 5m 둘레 1.5km를 축조하였으나 현재는 무너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0여 차례 발굴 사업을 통하여 인화문 토기, 쇠솥. 화살촉, 자물쇠 등의 금속 유물이 발굴되어 2020년 5월 20일 개관된 계양산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계양산성을 바라보며 길게 이어진 하산 길로 접어들자, 남쪽 모퉁이부터 눈이 녹아내려 길이 적당하게 젖어 있어 무겁게 싣고 있었던 아이젠을 벗으니, 발걸음이 깃털같이 가볍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산의 정수리에 쏟아져 내리고 훈풍이 불어와 산중에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 새봄이 다가오니 기쁜 일이 많이 생기고 새해가 되니 길한 일이 많기를 바란다는 말처럼 봄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부평의 진산인 계양산에서 설산의 즐거움과 축복을 누렸으니, 더없이 즐겁다. 행복한 하루를 갈무리하며 설중매 꽃망울 터지는 그날을 위하여 오늘이라는 삶의 한 장의 페이지를 넘긴다.


* 너덜길: 돌이 많이 깔린 비탈길 (순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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