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이후드(2014)> 리뷰
순간들이 모여 때가 되고, 시간이 모래처럼 삶 위로 쌓여 갈 때, 어느 순간 우리는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회상(回想)은 어린아이가 더 어렸던 순간들의 기억을 더듬는 듯, 그저 본능적인 시·공간적 유사성에 의해 무조건 반사처럼 피어오른다. 하지만 회고(回顧)는 회상과 다르다. 단순히 과거와 기억을 불러오는 방법인 '회상'은 암기와도 유사하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체득할 수 있는 지혜가 되는 반면, 특정한 순간을 추억이라 명명하고 그것이 나도 모르게 삶의 일부분으로 변모하게 됨을 자각하는 '회고'의 순간은 그 누구도 가르쳐주거나 도와주지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 막무가내로 걸어나가던 인생의 발자취들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우리에게 노크를 걸어올 때를 마주할 뿐이다.
그 때를 마주하면, 우리는 여러 시선과 속박에서부터 벗어나,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반추하게 된다. 여태까지 겪어 온 시간들과 그것에 대한 감정들이 퇴적되고 변성된 -아마 대다수가 자신의 '진짜' 자아와 '자기가 소망했던 자아' 속 간극에 실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진정한 자신'의 울퉁불퉁한 표면마저 웃으며 응시할 수 있는 순간을, 우리는 성숙이라 부른다. <보이후드>는 엘라 콜트레인의 98cm의 키가 178cm으로 커 가는 과정과, 페트리샤 아퀘트의 얼굴에 새겨지는 세월의 흔적을 통해 한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 한 명의 어른이 되기까지의 시간과, 성숙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셀 수 없는 시간들의 무게를 견뎌 온 이 세상 모든 어른들을 비추며, 관객들의 손등 주름을 살펴보게 만드는 성숙한 삶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시놉시스
여섯 살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 역)와 그의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 역)는 싱글맘인 ‘올리비아’(패트리시아 아퀘트 역)와 텍사스에 살고 있다. 아빠인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 역)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메이슨’과 ‘사만다’를 데리고 캠핑을 가거나 야구장에 데려 가며 친구처럼 놀아 주곤 하지만 함께 살 수는 없다. 게다가 엄마의 일 때문에 친구들과 헤어져 계속해서 낯선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메이슨은 외로운 나날을 보내며 점차 성장해가는데…….
<보이후드>는 1년에 한 번씩, 총 12개의 시퀀스를 나누어 촬영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배우와 같은 도시에 살아서 가족처럼 지내기도 했고, 배우들의 성장과 변화에 맞춰 스토리를 조정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영화의 시간은 수평선으로 진행되나, 자막으로 정확한 연도를 명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메이슨의 머리카락 길이나 배우가 자라거나 늙어가는 모습을 조각조각 스크린에 콜라주처럼 붙이거나, 2009년 차 안에서 흐르는 라디오헤드의 <Creep>, 그리고 작중 등장하는 게임보이 어드밴스, 닌텐도 Wii, 아이폰 3G 등 시간의 물증으로 기능하는 시·청각적 오브제들을 통해 16년 동안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또한, 각 에피소드가 전환할 때 이사를 가는 장면이나, 차를 타고 타지로 이동하는 씬을 이용한 트랜지션을 통해 시간의 연속성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명확히 존재하지 않는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처럼, 관객이 논하고 싶게 만드는 3차원의 현실을 포착하여 2차원의 스크린에 명시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전기영화와도 같은 <보이후드>는, 가상의 인물인 메이슨의 삶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픽션'이다. 그러나, 165분 동안의 메이슨의 '픽션'이 끝난 뒤,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과거라는 '논픽션'을 돌아보게 만드는 경험을 선물 받는다. 극장을 나온 후, 우리 모두의 '보이후드', 나 '걸후드'를 머릿속에서 상영하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보이후드>는 성숙해지는 메이슨 뿐만 아니라, 이미 메이슨처럼 성숙해진 관객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삶이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삶과 목표가 같은 단어라고 혼동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목표를 잃은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초점이 풀린 눈으로 살아가는 인생도, 생존이라는 목표를 이행하는 삶의 방식 중 일부이니까. <보이후드>는 극적이며 아름다운 빛나는 성취의 순간을 조명하지 않고, 미묘하거나 소소한 삶의 편린들을 메이슨의 시선을 통해 마치 이삭을 줍듯이 모아 나간다. 아이들과 올리비아가 방문한 식당의 매니저가, 집을 수리하러 온 올리비아의 조언을 통해 텍사스 주립대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씬처럼 말이다. 또한, 2006년 파티에서의 단절된 대화나, 두 번째 양아버지 산하의 아이들의 근황이 등장하지 않는 등의 미완결 에피소드를 통해 이 영화는 시간의 단편성을 강화한다. 게다가, 12개 에피소드가 2분 45초의 평균 런타임으로 구성되며, 이는 인간 뇌가 하루를 6-8개의 에피소드로 기억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보이후드>는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을 서사적, 구조적으로 편집하여 스크린과 현실 사이의 연대성을 높이며, 이는 관객을 메이슨과 그의 부모를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입시킨다.
너무 이른 나이에 아이들을 가지고, 뮤지션이라는 꿈을 바라보는 메이슨 시니어는 결국 보험 회사에 자리잡게 되며, 재혼한 아내와 새로운 아이를 가지는 등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올리비아는 두 번의 재혼 과정에서 알코올 중독자에게 가정 폭력을 당하거나, 세 번째 남편과 사는 집에서 하우스 푸어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대학교 강사라는 원하는 꿈을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아픈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보이후드>는 메이슨의 부모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메이슨 시니어가 2006년 아이들을 야구장에 데려가며 한 대사인 "우린 다 그냥 날림으로 해내는 거야"를 통해, 아버지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현실과 타협하는 성인으로써의 성찰을 보이는 반면에, 올리비아가 "나는 결혼, 출산, 이혼, 장례... 이 모든 걸 10년 안에 해냈어" 라는 대사를 뱉는 목소리는 성취감도 포함되어 있으나, 시간에 짓눌린 피로감이 더욱 잘 드러난다. 결국, 영화는 그저 그들이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조용히 읊을 뿐이다.
작중 마지막 씬은 메이슨과 니콜이 "순간들이 우리를 붙잡는 게 아니라, 우리가 순간을 붙잡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텍사스 풍경 속으로 카메라가 녹아드는 씬이다. 이는 카메라가 성장해가는 메이슨의 시선을 빌려 그와 그들의 가족, 삶의 바운더리에서 그를 거쳐가는 모든 사람들을 관조하며 "인생은 그저 달콤하지도 않고, 그저 씁쓸하지도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어린아이에게 이토록 사소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아이를 만들어나가며, 그들의 연약함과 강인한 회복력을 동시에 조명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희망이다. 오래 전 적었던 낡은 일기를 보거나, 자글거리는 화질 속 어렸던 우리와 그 속의 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누군가는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누군가는 우리 곁에 나타나기도 한다. <보이후드>는 삶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저 기록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기록을 지향할 뿐이다. 뒤돌아볼 수 있는 삶. 즉, 기억하며 추억할 수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휴머니즘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뿐이다. 과거는 너무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가장 빛날 순간임을, 그리고 그 빛의 내면에는 삶의 기록과 굴곡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긍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겪은 그 모든 순간들이 바로 우리가 되어간다는 바를 영화는 나지막히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