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폴: 뛰어드는 모든 이들에 대한 헌사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6)> 리뷰

by 더 레터박스


스토리가 이야기로 변모할 때

‘곡해’를 거쳐, 우리들만의 이야기로

우리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이야기는 정보와 교훈을 품속에 끌어안은 채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는 기록이라는 몸을 갖게 되어 스토리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수 세기가 지나고, 스토리는 이야기로서 우리에게 그것의 형태를 온전히 보존한 채로 여러 입을 오르내리며 자신을 널리 알린다.
하지만 스토리와 달리, 이야기는 ‘곡해’를 통해 스스로의 끊임없는 변화를 꾀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나 <홍길동전>처럼 동서양과 구전 방식을 막론하고,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텍스트 속에 담긴 그것의 특징을 스스로 묘사한다. 인물의 외양을 세부적으로 서술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입장에서 그린 이미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듯, 스토리라는 외피를 탈피해낸 이야기는 개개인의 심상 세계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다른 옷을 입는다. ‘하늘땅’과 ‘데덴찌’가 같은 놀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역마다 부르는 방법이 다른 것처럼, 우리는 유사한 존재들을 끊임없이 ‘곡해’하여 ‘개인화’시킨다. 이렇게 개인화된 이야기는 전체적인 맥락은 유사하나 그것이 지니는 고유한 이미지는 파편화되어 가지각색의 파생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에서는,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른의 ‘스토리’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곡해’한 ‘이야기’로 변모해가는 작품이다.


시놉시스

1920년대 로스앤젤레스, 영화 촬영 중에 다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 역)는 같은 병원에 입원한 꼬마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운카루)와 친구가 된다. 호기심 가득한 알렉산드리아를 위해 로이는 잔혹한 오디어스에게 복수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다섯 영웅에 관한 신비롭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환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점차 로이가 겪은 슬픔이나 사건과 섞이기 시작하며 뜻밖의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수동적인 ‘추락’: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대자연의 이미지 속으로, ‘낙하’

이 영화의 이미지 시스템은 그것의 아름다움을 제외하고도 매우 독특한 입지를 지닌다. 랜드스케이프를 비추는 익스트림 롱 숏과 부감 숏은 웅장한 자연과 대비되는 인물을 초라해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타셈 싱 감독은 이러한 익스트림 롱 숏의 반대급부를 내러티브적으로 용이하게 사용한다. 그것은 바로 극중극 구조인 내부의 이야기를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외부의 스토리와 비대칭적으로 연계시키는 스토리텔링 기법의 일부로 차용함으로써, 외부의 플롯을 더욱 현실적으로 대비시킴과 동시에 내부의 이야기에 외부 세계의 실존 인물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치밀한 내러티브 설계로 인해, 캐릭터들의 ‘추락’에 지니는 의도성은 제거되어 단순히 떨어진다는 피동적인 행위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이들을 추락시키게끔 만드는 로이의 ‘좌절감’을 이미지 시스템을 통해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미장센의 구조를 체계화한다.

타셈 싱 감독은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에서 이미지 시스템의 반대급부를, 극중극이라는 플롯의 내러티브의 일부로 편입하여 이를 영리하게 역이용한다. 거대한 절경의 이미지 시스템은 내부의 이야기가 영화의 직접적인 스토리와 결부되지 않는다는 암시를 나타낸다. 즉, 외부 세계의 화자가 내부 스토리를 자의적으로 설계하는 행위를 교차 편집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의도치 않게 극중극의 인물들에게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이는 20세기 초 당대의 극영화 스타일의 대사를 차용한 극중극 캐릭터들의 특성과, 높은 싱크로율을 지닌 배경 이미지 트랜지션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극중극의 의도된 ‘비현실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비현실성은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외부 스토리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드는 부가효과를 지닌다.
또한, 극중극의 이미지 시스템과 미장센은 외부 극의 화자. 즉 로이의 심상 세계와 그의 감정을 이야기 속으로 비대칭적으로 투영시키는 데 효과적인 요소로써 작용한다. 의도된 설계로 인해 캐릭터와의 감정적 연대를 경험하지 못한 관객들은, 극중극의 캐릭터가 절정 부분에서 연쇄적으로 제거되는 갑작스러운 스토리의 변화에 둔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즉, 캐릭터의 죽음이 애도되지 않는다는 것이자, 그들의 ‘추락‘에 담긴 의도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들은 인물들의 퇴장이라는 결과에서 ‘로이의 절망감과 좌절감’만을 오롯이 관조할 수 있게 된다. 타셈 싱 감독은 <이터널 선샤인>처럼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내부의 심상세계가 변화하는 극적인 시각적 대비성을 차용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이미지 시스템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함이라는 이미지를 인물이자 배경, 그리고 내러티브로서 승화시키게 된다.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이터널 선샤인>의 안티테제적 스토리 구성으로, 로이가 자의작으로 삶의 희망을 포기함으로 인해 극중극의 인물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조종하는 마리오네트로 전락시키게 된다. 그러고서야 마침내, 작중 내내 암시되어 왔던 ‘추락(the fall)’의 두 번째 의미가 이들의 죽음으로부터 피어오르게 된다.


능동적인 ‘하강’: 상처입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뛰어드는 행위를 예찬하며

이 작품의 메인 플롯은, 추락이라는 고통을 겪은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의 개입으로 인해 치유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마주하고 인정하며, 자신의 심적 고통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즉, 이 영화는 중력이 인물의 옷깃을 잡아당겨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순간을 관조하는 영화가 아니다.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능동적으로 ‘하강’하는 모든 이들이 겪는 과정과 굳센 결심을 예찬하는 영화이다. ‘추락’과 ‘하강’은 결과론적으로 같으나, 타셈 싱 감독은 두 단어의 배후에 감춰져 있는 ‘의도성’을 ‘낙하(the fall)’라는 현상을 분해하여 대조한다. 로이가 극중극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된 그의 추락 사고는 병든 마음으로부터 떠밀려 발생한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스턴트맨인 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다리 밑으로 뛰어내린 ‘능동적인 행위’의 부산물인 것이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도 처음에는 로이의 내면 세계를 참관하는 관객과 동일선상에서 플롯을 전개해나간다. 그러나 그녀는 로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녀가 로이에게서 듣길 원하는 이야기의 해피 엔딩으로 작중 인물들을 이끌어가기 위해 스스로 이야기를 ‘곡해’하는 능동적인 태도로 이야기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선택의 연쇄적인 결단으로 인해 진열장에서 떨어지게 되고, 큰 수술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수술을 만든 그녀의 실수는 로이의 병든 마음까지 고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는 작중 초반 교회에서 성체(eucharist)를 몰래 들고 와 로이에게 나누어 준다. 로이는 “내 영혼을 구원할 거니?” 라고 알렉산드리아에게 되묻는다. 그리고 모르핀을 가져다 주기 위해 저지른 그녀의 실수들은 엉겁결에 로이를 살리게 되고, 로이의 이야기(심상세계) 속에 빠져들어간(the fall) 그녀는 추락으로 인해 로이를 구원하게 된다. 마치 성화에 등장하는 아기 천사와 같이, 알렉산드리아는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지상으로 내려와 로이를 치유한다. 결국 로이는 알렉산드리아를, 알렉산드리아는 로이를 구원한다.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하강함으로 인해서.


떨어짐의 미학

낙하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해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떨어진다는 결과를 ‘추락’과 ‘낙하’라는 두 가지 견해로 분리해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떨어짐’과 ‘낙하’라는 두 가지 행동과 행위는 중복되는 어휘이기도 한다. 하지만 타셈 싱 감독은 로이가 슬랩스틱 배우가 된 후, 여러 슬랩스틱 장면들이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말하는 알렉산드리아의 “thank you, thank you, thank you very much!”라고 말하는 마지막 대사로 인해 병치되는 모든 ‘떨어짐’과 ‘낙하’를 종래에는 구분하지 않고, 그 모든 하강하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시각을 비춘다. 특히 “죽어라 고생만 하고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스턴트맨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타셈 싱 감독의 인터뷰 자료처럼, 극중극의 여러 인물들과 외부 세계의 등장인물의 혼용, 그리고 그들의 모든 물리적인 추락과 사랑에 빠지는 심리적 낙하들은 개인적 트라우마와 영화사적 전통을 전부 포괄하는 개념으로 변모한다.
타셈 싱 감독은 스턴트와 예술의 경계를 해체하고, 공허함과 희망을 엮으며, 웅장한 자연의 이미지를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 어린아이는, 꿈을 향해 리스크를 안고 뛰어내리거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빠져들며,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내면의 어두운 우물 속으로 낙하하는 그 모든 이들. 그리고, 이를 사명으로 삼고, 낙하하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 재미와 웃음으로 희망을 선사하기 위해 다리 위에서 뛰어드는 스턴트맨들을 향해 진심어린 키스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표하며 이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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