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히드는 기억한다. 고문당하던 자신의 귓등 뒤로 들려오는 공포의 의족 소리를. 그렇지만 풍화되는 자신의 기억 속 그 소리 하나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빼앗을 순 없다. 설령 그 사람이 아니라면? 의족을 찬 다른 누군가라면. 절름발이(에그발)를 납치한 후 사막 한 가운데 파묻으려던 바히드의 마지막 양심이 그에게 말을 건다.
그렇기에 바히드는 자신과도 같은, 아픈 상처를 공유한 이들을 알음알음 모은다. 하미드의 밴에 탄 시바와 골리, 그리고 하미드는 고문으로 인한 상처를 묻어버리거나, 상처를 딛고 살아가거나, 상처로부터 영원히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끝없는 논쟁 끝에 모든 고통의 근원일 수도 있는 이 절름발이를 죽이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딸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그렇게 이들은 납치된 남편이 담긴 나무 상자 위로 만삭의 아내를 눕혀 병원에 데려 간다.
그리고 마침내,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절름발이는 정신을 차린다. 숨겨 왔던 바히드의 끊임없는 분노를 받아낸 절름발이는 본인이 그 의족이 맞음을 자백한다. 순교자로 죽어 자랑스럽다는 절름발이의 허영심 앞에 시바는 그의 아들이 태어났음을 이야기한다. 태도를 돌변하며 아들을 보게 해 달라는 절박한 절름발이의 간청 앞에 바히드와 시바는 절름발이를 죽이지 않은 채 자리를 뜬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혼례 준비를 하는 바히드의 귓등에 의족의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카메라를 등지고 얼어붙어 있다. 오래도록, 오래도록.
이 작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두 집단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미’를 부여해 다큐멘터리적 서사의 지루함을 유머로 중화시키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화시키는 등 내러티브를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저에게는 처자식이 있어요.” 자비를 간청하는 악역의 클리셰와도 같은 이 대사는, 절름발이의 가족이 차로 개를 친 후 정비소에 들리는 오프닝 씬을 통해 그에게 ‘인간미’를 부여한다. 등장인물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전, 인간미를 부여받은 절름발이라는 캐릭터는 가정적인 아버지라는 긍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게 만듦과 동시에 무미건조한 죄의식의 소유자라는, 긍정적인 선입견과는 정반대의 찜찜하고 수상한 특성을 느끼게 하여 절름발이라는 캐릭터의 미스터리함을 부가시킨다.
이후 이러한 ‘인간미’는 유머라는 장치로 ‘전개’ 부분의 늘어지는 빌드업 속 감초로 활용된다. 자파르 파니히 감독은 이 영화의 톤이 어둡고 복수적임과 동시에 유머와 인간성이 가미되었음을 지속적으로 시사하고, 이는 이란 사회와도 유사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한다. 시바, 골리, 하미드의 폰은 압수했으면서 정작 절름발이의 폰은 압수하지 않는 장면, 절름발이의 딸이 혼자 병원에 있는 것이 안쓰러워 팁을 더치페이 하는 장면 등. 이러한 인간미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공존하여, 이들은 결국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장치이자, 폭력이라는 행위를 가로막는 원초적이며 가장 높은 방지턱으로 작용한다. 이 방지턱으로써의 인간미는, 이를 간신히 넘은 피해자들과 대조되는 가해자의 영악함을 강조하는 서사적 요소가 된다.
이 영화의 킥을 이야기하라면 단언컨데 소리이다. 오토바이 소리로 시작하는 첫 장면부터, 소리라는 요소는 미지에서 오는 불안감이라는 존재를 상징한다. 눈을 가린 채 벽을 등지고 앉아 심문을 받은 경험이 있는 자파르 파니히 감독은 이 영화에서 ‘고문’이 아닌 ‘심문’을 이야기한다.
소리는 그것의 변화무쌍한 형태를 빌려 고뇌를 불러온다. 윤리적인 문제 앞의 수많은 의견들과 갈등, 죄인의 아이가 간청하는 순수한 구원의 손길, 뒤바뀐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잃어버리거나 되찾아 낸 인간미의 편린까지. 목소리뿐만 아니라 오토바이와 밴,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족이 걷는 소리들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를 긴장시킨다. 인간미라는 요소로 동등해지기 시작한 피해자와 가해자는, 그 위치가 역전된 채 청각으로만 의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때 비로소 완벽히 상대방의 입장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복수를 완수함에도 끊임없이 소리를 낸다. 마지막 장면의 의족 소리는 그것이 절름발이의 것인지를 떠나 피해자들의 영혼 밑바닥에 남아 영원히 그들의 상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때로는 치유받지 못하는 상처들도 존재한다. 정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은 그들의 선에서 이 악순환을 끝내야 한다는 것. 즉, 미래의 이란에게 이러한 아픔을 되물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약혼자를 죽여버린 원수임에도, 오늘이 생일이 될 아이에게는 물려받을 죄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이 미래 세대들은 과거의 죄를 직시해야 한다. “개를 친건 아빠잖아. 무슨 신의 뜻이야.” 개를 친건 신의 뜻이라는 절름발이의 말에 그의 딸이 내뱉은 말이다. 절름발이의 귓등에 맴도는 죄와 마지막 장면에서 바히드의 귓등에 맴도는 벌. 이 모든 증오와 앙갚음의 악순환을 단순히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한 마디의 말로 온갖 책임을 무마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