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2018)> 리뷰 2부
벤을 단순한 악역으로 보는 시각부터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의 상징으로 읽는 관점까지 다양한 분석 방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벤의 진정한 의미는 그의 '냉소'라는 특권적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이 글은 벤의 '수용' 방식이 어떻게 가로축적 냉소로 발현되는지, 그리고 이것이 영화 전체의 미스터리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한다.
<버닝>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된 메타포는 물질적 우위와 열위의 구별이다. 이창동 감독은 전통적인 상하 구조의 계급 표현과 더불어, 수평면에서 벌어지는 배제와 소속감의 차이를 통해 계급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는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보여지는 수직적 계급 구조와 대비되는 <버닝>만의 독특한 공간 전략이다. 이 작품은 같은 장소에 위치한 세 명의 인물들을 다른 ‘층위’에 존재하게끔 표현하여, 미장센에 직유적인 ‘선’을 그어 관객들이 의식적으로 벤과 종수를 구별케 한다. 곱창집이나 커피숍에서 벤과 종수는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시각적 대척점을 유발하였으며, 레스토랑에서의 벤과 종수는 같은 앵글 속에서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그들이 만날 때마다 카메라는 가로축으로 패닝하여 이들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강조한다. 이는 교회나 헬스장 등 물리적 높낮이에 의해 직설적으로 구분되는 사회적 지위의 격차보다 더욱 불쾌한 계급적 차이를 시각화한다. 이러한 불쾌감을 유발하는 벤의 주요한 가치는 ‘재미’. 즉, ‘냉소’적인 삶의 태도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소설을 쓴다. 벤의 냉소는 상류 계층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적 무감각을 의미한다. 그는 하류 계층의 무의식적 괴리감을 은근히 유희하면서도, 최소한의 유대감만을 유지하는 선에서 이들과의 관계를 조절한다.
벤은 종수와 해미가 도달하지 못하는 높은 계급 속으로 그들을 초대한다. 하지만, 상위 계급 속에 초대된 그들은 그저 조소의 소재가 되고 만다. 벤은 이 사실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종수와 해미가 위치해야 할 ‘하류사회’에서 그들을 억지로 ‘상류사회’로 데려온다. 이때, 이들은 같은 공간에서 동등한 눈높이를 유지한 채 다른 이들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 해미가 그들 앞에서 춤을 추거나, 벤의 새 여자친구가 이야기를 하는 행위는 벤의 집에 있는 여러 미술품과 다름이 없는 처지로써 변모한다. 상류 계층 속의 그들은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전시’하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이러한 ‘가로축’ 전략은 시선 이론의 관점에서 명확해지며, 상류층의 시선 하에 ‘구경거리’로 객체화되는 하류층은 성적 대상화보다는 계급적 대상화로써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벤은 이들을 끝없이 ‘냉소’한다. 그가 스크린에 빈번하게 등장할수록, 그의 웃음은 관객들의 보편적인 정서로부터 심리적 괴리감을 유발한다. 벤의 ‘웃음’은(정확히는 종수의 시선에서 벤의 미소가 ‘의미심장’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그가 추구하는 ‘재미’라는 가치의 단순한 반작용이며, 역설적으로 이러한 반작용이 벤이 추구하는 인생의 태도이자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남의 터전인 비닐하우스를 유희적으로 점지받은 듯 불태운다는 벤의 말을 듣고 종수는 그에게 환멸감을 느낀다.
벤은 종수가 작중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재미를 위해 대마초를 피게 만들고, 종수의 꿈속에서 타오르는 어머니의 옷가지를 불타는 비닐하우스로 치환시킨다. 즉, 종수에게 불길은 고통이었으나, 일곱 살의 해미를 우물에서 꺼낸, ‘종수의 인식 속 종수’는 고통의 상징인 불이 불타는 비닐하우스로 변모하는 아이러니한 광경을 목도하며 혼란을 겪게 된다. 이후 종수는 해미에게 형언할 수 없는 폭언을 하고, 해미는 이 작품과 종수에게서 사라진다. 의문의 전화 한 통 만을 남긴 채.
이 모든 정황을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로써 남겨 두는 선택을 한 벤은, 종수에게 ‘베이스’에서 오는 울림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너무 인생을 진지하게 산다는 말을 건네면서. 하지만, 그 말을 한 순간 종수의 ‘베이스’이자, 유희와 고통이라는 두 의미 속에서 방황하며 그저 타오르기만 하던 불길은 벤의 냉소를 비닐하우스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선택’한다. 유희적 인생을 영위하는 벤의 베이스는 스스로의 ‘성급한 일반화’를 거쳐 종수의 베이스도 그의 삶 속 울림과 ‘당연히’ 공명하기를 원했으나, 벤은 계급이라는 가로 축의 심리적 거리에 가로막혀 종수의 내면 속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재미를 나열하여 냉소로 치환하고, 그 삶의 과정을 그저 ‘수용’하는 일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재미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끼는 웃음만을 남긴 채로. 그렇게 벤은 불붙은 비닐하우스처럼 스스로를 불붙이는 결말의 소설을 ‘수용’한다. 자신의 당연시되는 특권적 위치를 기반으로 한 선택적 무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냉소는 미스터리 자체를 자신의 유희 속 일부로 포함시키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종수가 최종적으로 벤의 ‘수용’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로써 거듭나게 된다.
아버지는 종수에게 자신의 잔재를 대물림하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이는 자발적인 전승보다는 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인 ‘자존심’으로 인해 변성되고 비틀린 세대 간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으로써, 아버지는 이러한 반대급부를 종수에게 무책임하게 떠넘기다시피 전이한다.
아버지는 선택의 기로에서 문제를 ‘타파’하는 인물로써 그려진다. 구청의 공무원을 폭행한 자신의 과실에 대해 변론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타파’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규정이나 관습을 척결한다는 뜻을 가진다. 즉, 아버지는 ‘자존심’으로 인해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선택의 의무와 그 순간을 ‘부정적’이라고 스스로 간주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행태를 종수는 이해할 수 없다. 종수는 그저 아버지가 남기고 간 소의 여물을 챙겨 주기 위해 파주로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종수는 아버지의 친구인 변호사가 그에게 대신 전해준 부탁을, 파주에서 ‘탄원서’라는 형식으로써 아버지의 소설을 씀으로써 이루게 된다. 그러나, ‘정다운 이웃’이라는 대목에서 보이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탄원서는 ‘픽션’이 된다. 즉, 종수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거짓으로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이다.
이후 벤과의 대화에서 밝혀진 바로는, 아버지는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반복되는 꿈 속의 불길. 그리고 불길을 목도하게 되는 내면의 분노를 남긴다. 종수는 작중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타인과 구별된다. 그러나, 그가 여물을 주는 소는 마치 고양이의 배설물을 치우는 것처럼 종수에게 인간애의 온정을 느낄 수 있는 요소로써 거듭나게 된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종수는 아버지에게 상처와 분노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애의 증거 또한 대물림받게 된다. 종수가 벽에 공을 던지며 그와 아버지의 액자를 치는 장면과 대비되는 이 사실은 관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종수에게 나쁜 존재였는지, 아니면 사회의 압제에 대해 타파를 외치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게 된다.
하지만, 소는 갑작스럽게 종수에게 찾아온 어머니의 빚을 갚기 위해 팔려가게 된다. 관객들은 아버지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마무리할 틈도 찾아오지 않은 채 종수의 인간애가 사라지는 장면을 보게 된다. 16년만에 찾아 온 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종수에게 금전이라는 목적을 은근히 강조하는 행태로써 관객에게 과연 이 사람이 어머니가 맞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종수는 아직 수수께끼 같은 세상 앞에서 자신의 소설을 쓸 수 없었다. 그는 부모의 잔재이자 자신을 증명하는 존재를 떠나보냄으로써 부모의 잔재를 갚는다. 그렇게, 세대 간의 온정을 잠시 종수의 곁에 머물다 사라지고, 자존심을 위해 선택 앞에서 타파를 결심한 아버지로 인해 금전적인 부담만이 종수의 곁에 남게 된다.
해미는 현대 젊은 세대의 실존적 조건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갈등은 개인적 문제를 넘어 구조적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년층의 보편적 경험을 반영한다. 그녀는 허기와 갈증이라는 현실적인 허기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미를 좇아 움직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해미는 세대와 계층을 넘나들며 온갖 문제들이 중첩된 상황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회피를 선택한다. 벤처럼 미스터리가 발생하는 이 상황 자체를 편애하지는 않으나, 미스터리 그 자체를 회피하고 모순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척을 하는 캐릭터이다. 이러한 해미의 이중적 상황은 그녀의 구체적인 행동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해미는 스크린에 처음 등장하면서 스몰 헝거로써의 춤을 춤과 동시에, 가슴 속 한 켠에 품고 있던 그레이트 헝거로써의 진정한 목표이자 의미인 ‘종수’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세계로 데려온다. 하지만 종수가 예상했던 해미의 내면 세계는, 그가 짐작했던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벤이라는 불청객을 데려오면서, 그녀는 통상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행보를 지속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모든 행보를 그녀가 단지 ‘그레이트 헝거’라는 이유만으로 치부한 채로 암묵적으로 용인한다. 사실, 관객들은 의아하고 질문을 건네고 싶지만 그녀는 미스터리를 내재화한 삶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에, 우리들의 눈 앞에 먼저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를 내버려둔 것이다. 미스터리를 품고 사는 그녀가 허기와 춤으로써 그것을 망각하는 이러한 역설적인 태도 또한 관객이 지속되는 사건의 변주를 따라가며 느끼는 위화감에서부터 피어난다.
해미라는 캐릭터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의미와 춤이 아닐까. 그녀는 끊임없는 몸짓으로 우리에게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간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해미는 카드빚으로 인해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벤의 말처럼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젊은 세대들은 끊임없이 의미를 좇게 된다. 불확실한 미래를 목전에 둔 채로, 순간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르는 채로. 세상은 스물이라는 허들을 넘은 순간 이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책임’이라는 삶의 무게를 젊은 세대의 어깨에 올린다. 젊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가치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의미’이자 목표이다.
의미이자 목표는 불변하는 이상향이다. 그러나 그 산 꼭대기로 가는 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북극성을 따라 정처 없이 발을 옮기는 삶처럼 말이다. 즉, 사람들은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가는 길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모은 돈을 아프리카 여행에 쓰고, 그 곳에서 배운 춤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려는 해미는 ‘의미’에 굶주린 것이 아니라, 의미에 ‘굶주린’ 것이다. 그레이트 헝거로써의 위대한 여정을 꿈꾸며 춤을 추지만, 실상은 그 춤을 마트 앞에서 추며 당장의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아이러니.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아이러니를 품고 살아간다. 그 인물들 중에서 우리가 내러티브적으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미의 춤에 대한 자신의 시선과 세상의 시선 속의 간극. 그 간극에서 오는 일방적이며 무의식적인 기시감이지 않을까.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며 그녀의 삶에 자신을 투영하려 했다가 투영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을 너무 똑같이 닮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자아를 잊고 다른 세계의 주인공에 몰입하는 시간’ 으로서의 순간을 잠시 망각했었던 것이 아닐까. 해미의 행태로부터 오는 동질감이 혐오감으로 변하는 순간. 해미의 굶주림이 우리에게 전이되는 순간. 그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이 영화의 진짜 주제인 ‘미스터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