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2018)> 리뷰 1부
온갖 삶의 행태를 응시하면 할수록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은 차곡차곡 쌓여 가기 마련이다. 정답이 없는 이 의문점들은 애초에 풀이할 수 없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걸 ‘미스터리’ 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인문학은 미스터리라는 매듭을 푸는 과정을 하나의 장르로 채용했다. 우리의 곁에 항상 존재해왔던 이 ‘답 없는 의문점’이라는 사회 현상은 어느새 인문학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미스터리라는 매듭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끊어 버린 고르디우스의 매듭과도 같이,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해결됨으로써 의의를 지닌다. 풀리지 않은 매듭은 ‘찜찜함’이 되어, 확실한 이야기의 끝을 바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야기에서만큼은, 이야기에서라도 이러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풀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닝>은 풀 수 없는 이 매듭을 베어내지 않으며, 관객에게 매듭을 던져 주고 그것의 처분을 기다리는 태도를 지닌 작품이다. 해미가 판토마임을 선보이며 ‘없는 것을 잊어버리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순간부터,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의 수많은 미스터리들에 대한 정답이라는 단어를 거부한다. 그는 해답 없는 문제 앞에서 관객이 내리는 ‘수용’, ‘타파’, ‘회피’라는 다양한 선택과 그 성질을 ‘소설 쓰기’라는 일련의 과정에 녹여 내려고 한다. 즉, 이야기로서 변모한 미스터리를 마주할 때의 다양한 선택들을 소설로써 박제해 놓는 것이다. 그렇게 종수는 벤, 아버지 그리고 해미 세 명의 세 가지 중첩된 선택들을 포착하여 소설 속에 새겨 넣는다.
선택들이 소설로써 변모되는 과정을 거듭할수록 이 영화 속 미스터리는 종수에 의해 나름의 답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타인의 소설을 쓰던 종수는 마침내 본인의 소설을 쓰게 될 본인의 매듭 앞에 당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선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내리게 된다. 벤과 같이 재미와 냉소로써 미스터리를 수용하는가? 아버지와 같이 대물림되는 분노로써 미스터리를 타파하는가? 해미와 같이 의미라는 끝없는 허기를 위해 미스터리를 회피하는가?
아쉽게도 종수는 불가사의를 마주한 타인들과 달리 선택을 내릴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그는 타인과 같이 미스터리를 안고 나아갈 수 없었다. 소설가였던 그는 수수께끼 같이 중첩된 세상의 이미지들을 활자로써 옮겨 담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공허하게 치솟는 불길로써 미스터리에 대응하는 ‘선택’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이전의 모든 선택들에 대한 대답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일곱 살의 순수한 아이로써 놓은 자의적인 불길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껴안은 채 격렬하게 연소한다. 하지만 불가사의로부터 태어난 종수의 소설 첫 페이지는 불길에 의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종수가 발견한 자신만의 진실은, 소설에 옮겨붙은 불이 꺼지면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