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下: 첫 페이지에 옮겨 붙은 불꽃

<버닝(2018)> 리뷰 3부

by 더 레터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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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소설:

종수 – 첫 페이지에 옮겨붙은 불꽃

유보했던 선택의 시간이 도래했다. 어떤 글을 쓸 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소설가인 종수. 그는 수수께끼같던 삶을 해결하기 전 까지는 글을 쓰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미스터리를 해결하려 다른 이들의 소설 -어떠한 사건을 마주했을 때 나타나는 선택의 세 가지 과정을 전부 체득한 후 이제 자신만의 선택을 내릴 시간인 것이다- 을 대신 집필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관객은 종수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따라가며 <버닝>을 관람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스토리가 아니라 에필로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즉 이 작품의 마무리는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카메라가 페이드 아웃 되면서 끝났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해미의 방은 빛이 반사되어 방에 들어오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이 장면은 유일하게 반사된 빛이 해미의 방으로 들어가는 구도로 촬영했다. 이후의 장면은 벤의 시선에서 진행되기에 종수는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이며, 종수와 정 반대로 정갈한 색조와 안정감을 주는 화면 구도 및 조명을 사용하여 적극적인 이질감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해미의 방이 등장하기 전의 장면들을 반추하게 된다.

종수는 소설을 쓰기 위해 모든 미스터리를 자신 나름대로의 해답으로 귀결시킨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이 모든 미스터리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내러티브를 설계한다. 특히나 해미를 찾으러 다른 여자 댄서에게 수소문을 할 때 해미가 착용하는 시계가 클로즈업으로 등장한다. 이 때 관객은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 작품에 이입하여 제공받는 모든 정보에 대해서 의문점을 표하기 시작한다. 벤은 과연 해미를 어떻게 살해하였을까?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여자가 종수 앞에 등장한 연유 등과 같은 여러 의문점과, 그 의문점에 대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낼 만한 정보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심스러운 정황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작중 1인칭 관찰자의 단계에서 머물던 종수는 해미와 비슷하게, 자신의 신념을 나름대로 관철해나가기 시작한다.

종수는 미스터리를 해결하던 중, 비닐하우스를 체크하거나, 벤을 미행하는 등 자신이 해미와도 같은 그레이트 헝거를 수행하며 실천하는 행위자로 비춰지는 이유- 자신의 신념의 뿌리가 무엇인지- 에 대해서 스스로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관객들은 마침내 종수의 신념은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분노가 아니라, 내면에 쌓아둔 울분으로부터 서서히 끓어오르는 불길인 ‘버닝’, 즉 억눌린 분노로부터 비롯됨을 깨닫는다. 아버지가 고집으로 징역을 살고, 16년만에 나타난 어머니가 돈을 요구하고, 여자친구가 어느새 다른 남자를 자신 앞에 데려오거나, 밤마다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오는 등. 외부 요인으로부터 끝없는 자극과 압박을 받는 종수는 이상하리만치 비정상적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선택을 목전에 둔 채 방황하고 고뇌하는 젊은 세대를 은유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결국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해답이 없는 미스터리를 자신이 믿고 싶은 내러티브로써 봉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종수의 첫 ‘선택’을 내리게 된 원동력은 그를 속박하고 있는 여러 아이러니라는 기름에 울분이라는 내면의 라이터가 만나게 된 것이다.

종수의 언어와 비언어적 행동, 낮은 채도의 미장센, 무채색에 가까운 그의 옷차림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핸드헬트 장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운드트랙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불의 뜨거운 이미지가 대립되며 종수의 분노는 서서히 시각적으로 축적됨과 동시에 관객에게 스며들어간다. 한 겨울, 칼을 맞고 포르쉐와 함께 불타 죽어가는 벤. 그리고 그런 벤을 두고 자신의 옷을 다 벗은 채로 트럭을 몰아 길을 떠나는 씬. 종수의 트럭은 와이퍼를 키고도 종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외경만 반사되어 지나갈 뿐이다. 즉, 그는 스스로의 소설 속에서 자신의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고, 자신만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희열을 느끼기도 하며, 트럭 앞유리의 반사된 풍경은 종수의 내면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종수의 분노는 대물림되었지만, 그 분노를 온전히 사유하거나 분출하기에 그는 너무 미숙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이 가장 잘 알았기에 우리에게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그는 소설을 쓴다는 메타적인 ‘선택’을 내리기로 다짐했다. 종수의 '선택'은 벤의 수용, 아버지의 타파, 해미의 회피와 달리 '창작을 통한 의미 구성'이다. 그는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서사를 통해 미스터리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진정한 '선택'의 의미다. 그러나, 종수의 선택이 완료된 후,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쓴 ‘소설’이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미스터리의 시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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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우물은 존재했었을까

메타포는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전화는 밤마다 끊임없이 걸려온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밥을 주러 간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료와 물그릇은 비워져 있고 배설물도 새로 생겨난다. 일곱 살 때 해미가 빠지고, 종수가 그녀를 구해 준 우물에 대한 증언은 유무가 엇갈린다. 특히 우물을 찾는 종수의 시선과 카메라 워킹을 통해 관객은 탐문자로 변모하게 되며, 여러 인물들의 상반된 증언이 등장하며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의 불확실성을 체감하게 된다.

전화기 너머로 들린 여러 잡음을 남긴 채 사라진 해미는 어디로 갔을까.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웠을까. <버닝>이라는 영화를 관통하는 플롯은 바로 ‘미스터리’에서 온다. “그곳에 우물은 존재했을까?”라는 관객의 질문에 대해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모른다” 이다. 밤마다 걸려온 전화는 어머니었을수도 있고, 해미가 기르는 보일이가 벤의 집 지하 주차장에서 종수와 처음 보았을 수 있으며, 벤의 수납함 속의 시계가 해미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자잘한 문제부터 벤이 해미를 살해했고 그 시체를 태웠을수도 있다는 중대한 문제까지. 결국 이 영화는 각 오브제가 등장하는 샷의 클로즈업으로 불안감만을 조성할 뿐, 이야기로 확답을 건네지 않는다.

우리는 앞선 파트에서 각 인물들이 종수의 행동을 빌려 그들의 소설을 체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탄원서, 벤의 꿈, 해미의 춤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과연 종수의 소설은 무엇일까? 바로 ‘메타포’이다. 종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꺼낼 수 없다. 왜냐하면, 소설가는 본인의 이야기를 직접 건넬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텍스트에 새겨넣는 순간, 그 책은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변모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종수의 시선으로부터 그려지는 것이 확실시되며, 이 모든 장면은 역설적으로 ‘메타포’로써 작용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으로써, 피상화된 여성의 존재를 경멸한다고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해미의 캐릭터성 또한 메타포이다. 종수의 집에서 대마초를 한 채, 벤의 차에서 들리는 노래에 맞춰 상의를 벗고 춤을 추는 해미의 모습. 음악에 심취한 채 춤을 추다 뒤를 돌아보고선 음악이 끊기고 그녀는 정색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을 통해 해미라는 캐릭터는 ‘그레이트 헝거’로써 춤을 추었다. 그러나 스크린에 담기지는 않았지만 추후에 종수가 내뱉는 실언으로 말미암아, 종수는 그런 해미를 멸시의 얼굴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벤의 말로써 짐작하되 해미에게 종수는 ‘의미’라는, 그녀를 우물에서 구해 주어 지금까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삶의 의미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의미’를 추구하는 행동을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였기에 해미는 종수를 떠난 것이며, 그레이트 헝거로써 해미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난 것이다. 남는 것은 카드 빚과 리틀 헝거로써의 자기 자신이며, 해미는 끝없이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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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이 영화는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발생한 미스터리를 여러 시각으로 대조하고 비교하며, 마치 추리 영화를 보며 추론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사실’로부터 메타포로써 은유되고 중첩된 여러 사회적인 ‘의미’를 도출해내는 과정을 지닌다. 플롯은 중첩된 이러한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일련의 계획서이다. 이창동 감독은 <버닝>이라는 영화 전체를 ‘메타포’로써 이야기한다. 이는 마치 현대예술처럼,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버닝>이 세상의 미스터리에 대한 무력감이나 분노에 관한 이야기”라고 명시했다. 이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이 직면한 '답 없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다. 취업, 계급 이동, 사회적 인정 등 모든 영역에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청년 세대의 실존적 조건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즉, 그는 우리에게 주제라는 테마를 통해 2시간 반 분량의 메타포로써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종수의 모습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이야기보다는 이 캐릭터들이 겪는 이야기의 허점. 즉, 설명해주지 않은 미스터리를 스스로 귀결시키는 과정과 그러한 확신이라는 존재의 모호함에 대해 질문한다. 답안지가 없는 질문 앞에서 메타포는 과연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모순들에 대해 고뇌하며 그것을 소설로써 승화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건넬 수 없다. 다만 메타포 뿐이다. 우리는 먼저 답하기를 시도한 이의 발자취를 그저 뒤따라갈 뿐이다. 필자도 이것이 충분한 답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객들이 찝찝함과 의아함을 양손 가득 들고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이 글을 읽는다면, 이는 메타포에 얽힌 사회의 여러 불안들의 잔상을 일일이 분석해서 정리한 것이니, 감독의 의도가 어느 정도는 통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스크린 너머로 그 억눌린 분노와 울분으로부터 타오르는 불꽃은 종수의 소설 첫 페이지에 옮겨 붙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불씨가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어둠을 밝혀 칠흑같은 사방의 유일한 불빛으로 변모하였을 때, 종수는 역설적으로 안도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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