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2025)> 리뷰
살다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순간을 마주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인정’의 문턱에서 현실을 수긍하고 납득해야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이행하려는 자는 성인군자가 아닐까. “(내가 정말 갖가지 노력을 다 해봤는데, 이젠 더이상) 어쩔 수가 없어.” 사람들은 체념이라는 뱀이 건네는 합리화라는 선악과를 베어 물고 품었던 꿈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여기, 아주아주 평범한 소시민이자 해고 노동자인 유만수씨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블랙 코미디 재취업 성공담. “사람은 넷, 자리는 하나”라는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를 신념처럼 믿는 유만수씨에게, ‘진짜’ 어쩔 수가 없는 건가요…?
태양제지에서 실직한 유만수는 아내 이미리, 아들 시원, 딸 리원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의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그 빈 자리에 자신이 취업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25년의 제지인으로써, 그는 관자놀이를 반복적으로 두드리며 “어쩔 수가 없다”는 합리화를 되뇌인다. 만수는 이 알량하고 짧은 핑계를 명분 삼아 인생의 재기를 노리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만수는 아버지의 유산인 권총을 물려받아 경쟁자들을 제거한다. 만수는 살인을 거듭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만수가 제거하는 경쟁자들 속, 만수는 자신의 인간성을 상징하는 여러 요소들을 피해자들에게 투영한다. 이후 그는 구범모와 고시조, 최선출을 차례로 살해하면서 피해자들에 투영된 그 스스로의 양심과 인간성도 같이 제거한다. 최선출을 살해할 때의 만수는 아버지의 권총마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다. 만수는 그의 두 손으로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모든 인간성을 죽이거나 묻어버렸던 것이었다.
범모를 염탐하던 만수는 그의 삶과 자신의 삶을 은연스럽게 동조시킨다. 만수가 옷장에서 미리와 댄스 연습을 할 때 “나만 따라와”라고 뱉는 대사는, 아라의 회상 속 범모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건넸던 말과 동일한 것처럼 말이다. 범모와 만수는 둘 다 ‘올해의 펄프맨 상’을 수상했고, 제지회사에서 25년을 근무한 인물들이며, ‘실업자’이다. 살인에 어리숙한 만수는 스스로를 철저히 숨긴 채 준오라는 아라의 내연남을 연기하였다. 아라의 손을 빌려 범모를 마무리한 만수. 그렇게 도망간 만수를 뒤로한 채, 구범모는 만수의 ‘자존감’을 품고 죽어버렸다.
고시조를 살해하기 위해 만수는 자신의 딸 리원과 고시조의 딸과의 연관성을 이용한다. 만수는 범모를 제거할 때와는 달리, 스스로를 조금씩 타인에게 드러낸다. 고시조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대충 가린 뒤 총을 발포한만수. 아버지의 권총을 빌리긴 했지만, 이 순간은 그가 자의적으로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장면이다. 사과나무의 씨앗이 된 고시조의 시체는 만수의 ‘현실과의 타협, 가족애’가 땅에 묻혔음을 의미한다.
작중 초반 만수는 고추 화분을 떨어뜨려 최선출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 그때의 어리숙한 만수는 이를 실천하지 못했지만, 이미 두 명을 제거한 ‘그것’은 더 이상 거리낌이 없었다. 만수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선출을 땅에 묻은 채, 마치 나무에 수액을 맞히듯 술과 고기를 역류시켜 선출을 질식사 시킨다. 만수의 마지막 양심이자 인간성의 말미를 상징하는 그의 충치. 만수는 9년 동안 끊던 술을 마시며 스스로의 인간성을 펜치로 뿌리째 뽑아낸다. 모든 ‘전쟁’이 끝난 만수를 안아주는 미리. 그러나 미리의 품에 안긴 ‘그’는 더 이상 이전의 만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합리화에 삼켜진,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이다.
미리가 만수에게 원예 쪽으로는 취업을 할 생각이 없냐고 이야기하거나, 만수를 ‘식물인간’ 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만수는 ‘원예사’와 같이 식물을 기르고 키우는 것에 온갖 열정을 쏟는다. 하지만, 작중 초반에 만수가 케이블을 분재에 묶어 그것의 가지를 부러뜨리는 장면과, 첫 면접에서 햇빛이 만수의 눈을 부시게 해 그림자로 몸을 숨기는 장면. 이 두 장면들의 병치는 이후 만수가 자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밤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햇빛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인 '원예'라는 행위보다, 인공적인 조명빛만이 존재하는 공장 속에서 만수가 행하는 '제지'라는 행위를 쟁취하기 위해 '전쟁'을 치루는 만수라는 인물. 관객들은 만수가 사실 나무를 무참히 베고, 불리고, 깎음으로써 펄프를 얻는 ‘펄프맨’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스스로가 얼마나 자신의 온실 속 식물을 사랑했을지언정, 이 영화의 엔딩은 이러한 만수의 행동을 일갈한다. 여러 비극의 원초이자 인간성의 타락을 상징하는 ‘종이’의 메타포와, 그것의 원료인 ‘나무’가 지니는 여러 비유 중 소모품으로써 치부되는 생명이라는 메타포를 생각해보면, 해고할 명단을 제출하지 않아 실직한 만수의 대의명분은 애초부터 동료들을 빌미로 한 ‘위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위선은 가족들에게 들키게 되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위악’으로 변질된다. 이 과정에서 이전과는 달라진 만수의 낌새를 눈치 챈 가족들은, 이미 만수와 같은 배를 타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위악과 위선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이미 이 집의 땅 속에, 나무의 뿌리 아래, 그리고 만수네 가족 모두에게 내재화된 죄악을 소화한 ‘척’ 하게 된다.
"다 이루었다”는 만족감으로 회귀하기 위해 발악하는 플롯. 하지만 “더러운 데서 맛있는 게 나오는 법”이라는 만수의 대사처럼, 만수네 가족 곁으로 돌아온 낙원은 과연 이전과 동일한 장소인가? 라는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다.
수만 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하여 땅에 묻은 아버지. 사과나무 아래에 시체를 태아마냥 묶어 묻은 만수. 가정 형편에 도움을 주기 위해 훔친 폰을 묻은 시원. 3대에 걸친 죄악을 ‘묻는’ 행위는 사과나무로써 자라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내재된 죄악의 부끄러움을 깨달아버린 가족들. 그들은 뱀의 꾀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명분과 합리화로 죄악을 내재화한 채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다. 만수의 첫 출근 장면에서 만수는 나무를 나르는 트럭 사이로 차를 몰고,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공장의 ‘소등 시스템’을 조작하며 영화는 끝을 고한다.
“종이를 만들기 위한 나무는 따로 있고 벌목된 후 그 위에 새로운 나무를 심는다.” 최선출의 이러한 대사는 식용을 위해 길러지고 도축된 뒤에 새로운 개체를 기르는 돼지와, 노동을 위해 고용되고 해고된 뒤 새로운 사람을 고용하는 노동자에 대한 메타포와도 일맥상통한다. 즉, 돼지와 사람(노동자)는 소비재로써 소모되고, 펄프가 되기 위해 베어지며 껍질이 벗겨지는 나무와도 같은 메시지를 지닌다. 만수는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 실직을 당했던 것인줄 알았으나, 정작 그는 먹히기 위해 돼지를 도축하듯, 껍질을 벗기기 위해 나무를 벌목하듯, 노동하기 위해 고용된 같은 노동 계급의 인물들을 살해한 뒤 모든 인력이 기계로 대체된 공장에 존재하는 유일한 노동자로써 잔존하게 된다.
우리가 경악해야 할 것은, 시체와도 같이 나뒹구는 나무는 지폐, 담배 등 여러 형태의 종이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종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로써 그 사회 속에 종속된 인물들에게 “어쩔 수가 없다”는 알량한 핑계의 합리화를 전염시킨다. 작중 '종이'를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하여 사과 나무 모양의 첼로 악보를 만든 만수의 딸 리원은 만수가 출근한 뒤 비로소 완전한 연주를 들려주게 된다. 그러나, 미리가 작중 내내 리원과 타인들을 구분하는 선을 넘게 되며 리원은 죄악으로부터 노출되게 된다. 사과나무 아래를 킁킁거리는 시투와 리투 두 마리의 개들 또한 그들이 낙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만수네 가족이 치뤘던 참혹한 악행. 그들 또한 그 원죄의 대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살인의 도구가 된 화분의 밑바닥으로부터 새어 나온 만수의 마지막 양심. 그 가녀린 물줄기는 ‘가장’이라는 단어의 물리적인 무게를 힘겨워하는 만수를 비웃듯, 그의 관자놀이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며 '위선'도 아닌, '위악'도 아닌, 순수한 죄악이 된다. 하지만, 만수는 돌이킬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을 되뇌이던 습관만을 지닌, 완전히 다른 존재로써 변모타락해 버렸으니까.
<어쩔수가없다>는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에 걸맞게, 유머와 시스템 비판이 ‘달콤씁쓸하게’ 잘 버무려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유머라는 키워드를 ‘킥’으로 삼아, 거부감이 덜한 대중 친화적 방식으로 접근한 초반의 내러티브가 주는 몰입감으로 후반부까지 진행되는 에너지를 얻는다.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오브제와 미장센을 통한 다층적인 메타포(은유)들을 쌓아 올리다가, 박찬욱 특유의 ‘불쾌한’- 필자는 이를 ‘질감이 느껴지는 내러티브’라고 부른다. 대중적인 심상을 유지하는 내러티브는 별도의 의문점 없이 편하게 수용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안온함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껄끄러운’ 심상을 필두로 한 박찬욱의 내러티브는, 관객들로 하여금 깔끔한 답을 내리기 힘든 양가적인 딜레마에 빠지도록 스토리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의 도발적인 연출이 빈번히 등장하면서 이 영화가 단순히 풍자를 위해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 이어지는 엔딩과 크레딧의 여러 장면 또한 이 영화가 ‘종이’라는 오브제가 함축하고 내재한 여러 과정과 의미들을 곱씹게 해 주는 ‘벅차오르는 찝찝함’을 선사해준다. 그 순간, "아, 역시 박찬욱이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