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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내려는 자, 숨기려는 자 - <중경삼림> 上

<중경삼림(1994)> 평론

by 더 레터박스

충칭맨션의 수많은 문틈 사이, 발자취와 이야깃소리 너머를 비추는 프레임은 마치 카메라의 셔텨와 같이 영화에서 시간의 흔적을 보존하고 재생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공간 속에 시간이 깃들어 장소로 변모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간은 공간이라는 무생물에게 애착이라는 영혼을 부여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활기를 띄게 한다. 생명이 깃든 공간은 그를 지나친 사람들이 남긴 순간을 모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된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의 한 구절처럼, 수 없는 세월을 이겨낸 공간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장소'라는 호칭을 수여받게 된다.


하지만, 장소가 상징화되는 이유는 그것의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시간'. 즉, '추억' 때문이다. 시간은 휘발된다. 달리 말하자면 흔적을 남길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떠나가는 존재는 항상 멀리 느껴지지만, 영혼을 가진 공간인 장소는 인간과 달리 소멸을 번복하고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추억으로 재가공한 뒤, 그들의 창조주에게 잊혀버린 추억을 환기시킨다. 과거의 현장만큼 그 머나먼 순간이 나에게로 생생히 도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중경삼림>은 역설적이게도 '장소'로부터 '시간'을 분리한다. 왕가위는 ‘회화’의 요소에서 착안하여 충칭맨션의 형태를 스텝 프린팅 기법을 사용해 시공간을 고의적으로 곡해하여 배경으로부터 인물의 시간을 분리하며, 이는 혼탁한 명암 표현을 통해 인물들 간의 상대적이고 애매한 사랑의 거리를 시각화한다. 그리고, 청록빛과 초록빛 사이의 노이즈가 만연한 필터를 덧씌워 90년대의 후텁지근한 홍콩 도심가를 스크린 속에 면밀히 재현함으로써 우화적인 스토리를 현실 속으로 덧씌운다. 이 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초록빛의 어두움이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짙은 녹색의 음영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심미적이고 회화적인 특성을 극대화한다. 이는 필름을 ‘시네마’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또한 회화적 시각 정보의 탈사실성으로 인해 이미지를 서사적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게끔 만든다. 즉, 표현된 메시지에 관객이 더욱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난 후, 영화는 로맨스라는 장르에 공간과 분리된 시간과 결부되었던 사랑의 숨결들을 녹여낸다. 이러한 회화적 왜곡을 통해, <중경삼림>은 특별한 사랑의 순간을 이야기의 형식 속에서 보편적인 애정으로 재현한다.


공간이란 또한 사랑의 형태를 담는 그릇일 뿐만 아니라, 페이가 바꿔버렸던 633의 집처럼, 사랑이 머물고 간 온도와 같다. 특히나 사랑의 순간을 담아낸 궤적(사랑을 느꼈던 때 위치한 곳)은, 장소가 지닌 그 공간보다 더욱 큰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우화적인 면모를 현실에 투영한다. 왕가위는 애정을 영사기에 투영하기 위해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사랑의 부재로 인해 방황하는 순간들의 연속성을 조명한다. 일반적이지 않고, 어떻게 보면 뒤틀려 있다고 치부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애정의 갈망은, 역설적으로 배타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사랑을 칭송한다. 단지 새로운 사랑을 대면하기에 불충분한 순간들이 존재한다는 바를 넌지시 속삭이지만, 왕가위는 방황하는 시공간을 부정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 순간마저도 사랑의 범주라는 것을 긍정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를 너무 규정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공간만이 해답을 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장소’에서 조용히 사랑을 관조한다. 따라서 본 평론은 왕가위가 어떻게 회화적 기법으로 공간과 시간을 분리하고, 그것을 사랑의 감각으로 재조립했는지 살펴보며, 영화 중경삼림이 품은 비현실적이지만 보편적인 로맨스의 역설을 고찰하고자 한다.




1부: 덜어내려는 자, 숨기려는 자


영화의 전반부는 경찰 번호 223 하지무(금성무)가 연인에게 통보를 받은 지 30일째 되는 날로 시작된다. 그는 ‘무언가가 지나치게 신선하면 마음이 상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은다. 그는 이 기한까지 애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한편, 금발의 가발을 쓴 여인(임청하)은 마약 밀매가 꼬이며 추적을 피해 도심을 떠돌고 있다. 그들은 5월 1일 새벽, 술집에서 서로 만나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쉬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를 호텔로 데려간다. 그녀는 호텔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고, 그는 그녀의 구두를 벗겨 넥타이로 깨끗이 닦아 놓은 후 그녀가 깨기 전에 조용히 떠난다.


하지무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는 씬에서 지형지물에 의해 끼여 보이며, 계단을 질주할 때 프레임 안에 갇힌 구도가 반복된다. 또한 수화기로 전화를 걸 때는 비틀거리는 움직임을 취한다. 카메라는 마약 밀매를 준비하는 시퀀스와 여인을 쫒는 인도인들에게 총을 쏘는 씬을 진행하는 동안 핸드 헬트와 기울어진 카메라의 각도를 통해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시점을 투영한다. 또한 카메라는 비틀린 시선과 각도로 그들의 결핍을 비춘다. 그들의 결핍이란 도피와 같다. 하지무는 과거로부터의 도피를 갈망하고, 여인은 외부로부터의 자아 도피(은폐)를 갈망한다. 그들은 각자 이루는 바에 도달하기 위해 몸을 옮김으로써 각각 조깅과 출국이라는 행동으로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이 발을 옮기는 이유는 전달자로써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숨기기 위해서이다.


하지무는 작중 ‘덜어내기’를 반복한다. 그는 실연의 상심으로부터 도피하는 행위를 통해 슬픔을 덜어내려 노력한다. 그러나, 덜어냄을 반복하면 채움이라는 반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이해의 매개체로 명명한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없기를 바란다. 만일 유통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겠다.’ 는 그의 내레이션과 달리, 통조림을 열어 기억을 먹으며 망각을 행한다. 정확히는, 망각이 아니라 ‘망각을 통해 비워냄을 실천하는 자가이해’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해’를 토해내고, 이해마저 떠나간 그의 내면에 공허만이 남을 때, 그는 과식, 과음, 조깅 등의 반복되는 도피를 통해 심적 공허를 채우려 노력하며, 슬픈 마음과 이해를 피해 스스로를 매종한다. 스물다섯이 된 아침, 그는 조깅으로 몸 속 수분을 덜어낸다. 이 모든 ‘비움’의 행위가 사실은 사랑에 대한 갈망을 은폐하기 위한 자기방어였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여인은 하지무와 반대로 스스로를 숨기는 일을 반복한다. 레인코트, 선글라스, 가발을 착용한 그녀는 관객에게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인도인들이 신은 신발 사이의 구두와 같이, 그녀는 충칭맨션의 모두와 구별되는 이방인으로써 등장한다. 그녀는 애초부터 이 장소를 떠나야 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파인애플 통조림은 생명의 유통기한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존재와 모습이 하지무에게는 ‘기억’이자, 소중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이해함을 드러내는 오브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출국 시간이 임박할수록, 발걸음이 느려질수록, 구두의 먼지가 닦일수록 미장센의 방점에서 화면 속 하나의 오브제로 동화된다. (특히 하지무와 등장하는 투 샷에서의 밸런스가 점점 동화된다) 이는 극중에서 하지무와 여인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려는 덜어내기와 숨기기가 만나게 되는 지점이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키워드의 하지무와 달리, 그녀는 마약 밀매라는 사건을 통해 인생의 ‘찰나’에 충칭맨션에 도달하게 된다. 두 인물의 대비되면서 양립되는 서사적 배경은, 바에서 처음 만난 후 점점 비슷해지며 호텔에서 구두를 닦아주는 투 샷을 기점으로 여인의 정체성이 해체되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사람은 변한다. 어제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 있다.” 는 여인의 대사처럼 파인애플은 기억과 이해를 나타낸다. 그녀의 말을 긍정하듯 하지무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비우고, 여인의 퇴장마저 뜯어진 통조림으로 자신의 말을 뒷받침한다. 통조림으로 봉해져 유예된 옛 연인과의 ‘추억’을 떠나보내는 자신을 ‘이해’하려다, 결국 이를 토해내는 하지무의 모습이나, 자신의 대사에 걸맞는 행동을 한 하지무에게 무엇을 느꼈을 지는 모르겠지만, 금발 가발의 여인이 아니라, 출국을 앞둔 702호의 투숙객으로써 남긴 생일 축하 메시지는 하지무에게 일련의 ‘기억’이자 ‘이해’라는 생일선물과도 같다. 결국 둘은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하지무는 조깅 후 삐삐로 눈을 가리는 화면 구도를 통해 사랑의 아픔으로부터 숨으려는 자신의 행태를 자각하게 되며, 금발 여인은 분장을 벗고 충칭맨션을 떠남으로써 스스로에게 씌운 가면을 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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