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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Nov 13. 2023

귀염설을 믿자

내가 너무 아끼는 언니가 있다. 언니는 나와 8,9살 차이가 났지만 내 애정 레이더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내가 이직을 망설일 때 쓸데없는 거에 마음 쓰지 말라며 나를 지지해 준 사람이기도 하고, 나를 생각하면 가야 한다고 말해준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팍팍한 회사 생활 속에서 언니는 너무 따스한 사람이었고, 회사를 옮겼어도 언니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두 번은 나를 걱정하는 연락을 해 준다.

내가 언니를 좋아한 이유 중 하나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소화하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소화되지 않은 부정적 감정을 오롯이 듣는 것은 너무 지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언니가 너무 좋았고, 배우고 싶었다. 언니는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지도 않았고, 걱정이나 힘든 일은 언니가 감정적으로 소화를 한 뒤 나에게 그 마음을 알려 주었다.

그런 언니가 갑자기 술을 먹자고 했다.


"언니 술 못 먹잖아요.. 뭔 술?"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니까 가자!"


"언니 제일 추한게 혼자 취하는 거예요. 취해도 우리 집에서 취해야지. 우리 집으로 가요."



언니는 원래도 언니를 포함한 다른 두 명의 언니들과 종종 우리 집에 왔었다. 내가 손이 어마무시하게 큰 걸 아는 언니는 굳이 요리하지 말자며, 퇴근길에 먹을 걸 사가자고 했다. 집 근처에서 내가 좋아하는 해산물과 언니가 좋아하는 떡볶이, 내가 먹을 써머스비 맥주와 언니가 마실 무알콜 맥주를 샀다.

어느 정도 먹어가자 언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 요새 C 씨가 미워지려고 해."


"왜요?"



C 씨는 워낙 베풀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언니는 늙어서(?) 아침잠이 없다며 늘 일찍 출근했는데, C 씨는 언니만큼이나 일찍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C 씨는 아침마다 언니를 포함 다른 사람에게 늘 먹을 것을 조금씩 나누어주었다. 귤, 초콜릿, 고구마, 쿠키 등등. 그런데 공교롭게도 언니는 귤을 싫어하고 당 수치가 높아 단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 언니가 몇 번씩이고 계속 거절했음에도 "저는 많아요. 드세요."라며 쥐어주었다고 한다.


"언니 당 때문에 안된다 그러지 그랬어요."


"괜히 내 이야기해서 뭐 해."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이게 반복되니 어느 순간 C 씨가 언니 근처로만 오면 인상이 찡그려진다고 했다. 그 사람이 호의로 하는 행동이 언니에겐 스트레스였다니. 이래서 배려는 어렵다. 배려 없는 호의는 강요가 되고, 자칫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언니 제가 싫은 사람이 조금은 좋아질 수 있는 비밀 알려드릴까요."


"뭔데? 그리고 나 그 사람 싫은 거 아니야."


"아무튼. 알려줄까요?"


"효과 있으면 커피 사줄게."


"내일부터 그 사람이 하는 게 귀엽다고 생각해 봐요. 언니는 처음이니까 제가 도움을 드릴게요."


언니는 의아해하며 식은 떡볶이를 뒤적인다. 집에 아무도 없지만 괜히 분위기를 잡고 싶어 목소리를 낮춘다.


"내일부터 언니한테 거슬리는? 행동들을 귀엽다고 생각해 봐요. 말이 센 사람은 강아지들이 관심받으려고 앙앙 짖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거나 그런 식이에요. 언니는 햄스터 키우니까 햄스터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햄스터가 먹이 잔뜩 저장해 놓고 나눠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도 다 언니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구!"





이건 내가 어렸을 적부터 꽤나 효과를 본 방법이었다.

어느 순간 작은 미운 모습이 보이면 한도 끝도 없이 미운 것이 보였다. 딱히 잘못한 게 아니어도 밥을 왜 저렇게 먹지, 말을 왜 저렇게 하지 등등 모든 것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귀여운 걸 찾아내려고 한다. 귀엽다 아주 귀엽다.

과학적 근거는 모르지만 꾸준한 내 귀여움 최면은 어느 순간 효과가 나타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줘도 큭큭대게 되고 내상을 딱히 입지 않는다. 세상사 무엇이든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로 잘 찾으면 모든 이에게는 귀여운 면이 조금씩 다 있다.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이 있지만 나는 귀염설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귀염설의 부작용도 있다."귀여워."를 남발하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나의 칭찬의 본심을 의심하게 된다는 아주 사소한 부작용도 존재한다.



곧 언니가 나에게 커피를 사줄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귀여움과 다정함이 세상을 지배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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