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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Dec 04. 2023

ISFP의 일탈

예상된 일상 속에서 갑자기 충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저지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굳이 그 이유를 규정짓자면 내가 ISFP라서? MBTI를 신봉하진 않지만 이것만큼 간단히 나에 대한 설명이 끝나는 것도 없다.


참고로 ISFP는 내향형, 감각형, 감정형, 인식형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내향적, 현실적, 감정적, 유동적 인간이다. 쓰고보니 하나도 쉽지 않긴 하지만.


아무튼 ISFP인 나는 주기적으로 무엇인가 충동적인 일을 저지른다. 대학을 마음대로 자퇴하고 다시 학교를 들어간 것이나,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직업을 8년 넘게 하는 것? 더 소소하게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계속 연락하는 전연인에게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던 일 등이 있다.


사실 크게 관조해 보자면 모두 충동이 아닌 필연의 한 과정들이었다. 대학은 가고 싶은 과가 아니었기에 뭐가 되었든 다시 시험을 보았을 것이고, 직업은 내 성향에 맞고 재미도 있으니 언젠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다. 오히려 헤매지 않고 맞는 직업을 찾았으니 운이 좋았다. 전연인은 사실 그리 많이 사랑하진 않았었다. 딱 그 정도의 마음만 가졌을 뿐, 그때가 아니어도 곧 헤어졌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의 충동도 나름의 인과관계가 있다. 그날 나는 다분히 상처 입었고, 회사 말고 집중할 다른 곳이 필요했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싶었고, 굳이 애쓰고 싶지 않았다. 좋게 말해 건강한 해소이고, 나쁘게 말해 회피이다.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린다고 해도 내가 갑자기 유튜버가 된다거나 수학 공부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내 바운더리 안에서 내가 적당히 재밌어하고, 적당히 빠질 수 있고, 적당히 잘할 수 있는 게 뭘지 생각했다. 퇴근하면서 정말 갑자기 B에게 카톡으로 선포했다.




"우리 얘기했던 그 밴드부 나 방금 가입했어."



"......응?"




하고 정말 충동적으로 가입해 버렸다. B는 엉겁결에 비명을 지르며 나와 함께 밴드부에 가입했다.


생각해 보면 바이올린 할 때의 나는 솔로보단 관현악단에 들어가 여러 악기와 합주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하나의 완성된 곡을 만들 때의 짜릿함이 더 좋았다. 혼자 할 땐 만들 수 없는 소리라던가, 빈 곳 없이 꽉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한가로운 주말 아침. 터덜터덜 생전 처음 가는 역으로 향했다. 같이 가기로 했던 B는 마침 친구의 결혼식이 겹쳐 다음주부터 가기로 했다. 옳다구나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같이 해주는 마음이 예뻐서 봐주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무슨 역할이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의 마음으로 무념무상 지도를 따라갔다.


긴장되니 역에 내려 헤이즐넛 아메리카노를 하나 샀다. 똑똑 쭈뼛대며 문을 열자 나와 똑같은 표정을 한 분이 계셨다. 다행스럽게도 혼자 신입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설명을 듣고 가입신청서를 썼다.


신상정보 외에도 맡고 싶은 역할, mbti,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음악 장르, 성격 등 신선한 질문들이 있었다.


맡고 싶은 역할? 기타 못 치고, 드럼 못하고, 음향기기 못 다루고. 건반에 체크했다. 물끄러미 내가 쓰던 걸 보시던 분이 말을 걸어온다.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서글서글한 남자분이었다.




"톤이 좋으셔서 보컬인 줄 알았는데 건반이셨네요. 건반 해보신 적 있으세요?"




"감사합니다. 사실 전자피아노는 쳐본 적 없고 클래식피아노는 어릴 때 조금 배웠어요. 성인 되어서는 재즈피아노 조금 다닌 것 밖에는 없어요."




톤 좋다는 말에 홀랑 넘어가 보컬에도 체크한다. 대신 괄호치고 배우고 싶다고를 덧붙인다. 분명 다음 주면 후회할 거다.


나머지도 슥슥 쓰는데 "좋아하는"이 들어가는 질문들과 성격에서 턱 막혔다. 같이 오신 분을 슬쩍 보니 거의 서술형으로 쓰고 계셨다.


무엇인가 떠올리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다. 뭔가 좋아하는 가수면 엄청 좋아해야지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시경, 검정치마, 에픽하이, 넉살, 백예린, 악뮤 요즘의 카롤라 브루니까지. 떠오르는 가수들은 많은데 딱 꼬집어 쓰기가 어려웠다.


좋아하는 장르도 마찬가지였다. 성시경부터 에픽하이까지 그냥 꽂히면 들었기에 사실 취향이랄 것이 없었다. 요즘 많이 듣는 게 재즈니 그나마 장르는 재즈..라고 쥐어짜서 적었다.


성격? 내 성격을 이 조그만 칸에 어떻게 쓰지.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펜까지 내려놓고 고민하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분은 쓰기 어려우시면 비워도 된다고 말해 주셨다.


결국 나는 좋아하는 가수와 성격 칸에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가입지원서를 냈다. 성격이야 그렇다 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불분명하다는 점은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재즈바에서 연주에 몰두한 사람들을 보며 멋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얼굴을 잔뜩 구기며 노래를 한다거나, 기타에 집중해 표정이 일그러진다거나 하는 모습들이 우스꽝스럽기는커녕 너무 반짝이고 멋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폭 빠져있는 모습은 충격적으로 매력적이었다.


그때 이후로 줄곧 나는 저들처럼 어떤 것에 폭 빠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눈을 반짝이며 몰두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너무 곧이곧대로 자라와서 그런가. 내 취향을 찾을 새도 없이 어느새 몸만 자란 어른이 되었다. 알맹이는 채워지지 않은 채 늘 다 좋고 다 괜찮다 했더니 취향이란 게 없어진 것 같았다.


ISFP를 설명하는 단어 중 '충동적 나무늘보'라는 표현이 있다. 개인적으로 정확하게 와닿는 표현이기도 했다. 충동적 나무늘보인 나는 아마 주말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후회할 것이다. '이런 충동적인 짓을 왜 했지. 아 가기 싫어.' 뻔하다.


그치만 어쩌면 이번 나의 충동은 좋아하는 걸 찾아가는 필연의 한 걸음이 아닐까. 무색무취의 인간에서 나만의 색채가 조금은 입혀진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다음 주말, 오늘의 충동을 후회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합주에 폭 빠질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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