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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Dec 19. 2023

프린세스 메이커에 관한 고찰

나와 여덟 살, 다섯 살 터울이 나는 내 동생들은 유난히 함께 게임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소닉부터 시작해 각종 플래시 게임, 옷 입히기, 화장하기, 오투잼, 스토리 게임 등등. 동생들이 한글을 못 읽을 때부터 더빙하듯 이야기를 읽어주며 게임을 해서 그런지, 동생들은 동화책을 듣는 것처럼 나만 보면 게임을 해달라고 졸랐다.


컴퓨터 전원을 켤 때부터 동생들은 방방 뛰기 시작했다. 각자 의자에 앉아도 될 테지만 꼭 둘 다 내가 안아주길 원해서, 멀쩡한 의자를 내버려두고 긴 피아노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다. 그리고 나는 다리를 쫙 벌려 내 앞에 동생들을 앉히거나 무릎에 한 명씩 앉힌 채 게임을 했다. 특히 동생들이 좋아했던 건 '프린세스 메이커'였다.

출처: CFK



프린세스 메이커의 플레이어인 '나'는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한 기사이며, 게임의 목표는10살 여자아이를 양녀로 맞아 18살 때까지 딸을 성실히 키워내는 것이다.


게임은 꽤나 섬세하다. 게임 속 딸은 체력, 근력, 지, 기품, 력, 도덕성, 신앙, 업보, 감수성, 스트레스라는 개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딸의 능력치를 키워주기 위해서는 무예, 학문, 예법 등을 가르쳐야 하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한다. 교육과 아르바이트만 하면 딸의 스트레스양껏 치솟게 된다. 스트레스가 높아지면 불량아 상태가 되기도 하고, 몸이 약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일주일을 통으로 날리기도 한다. 이때는 적절하게 자유 행동을 하며 바캉스나 휴식을 취해주어야 한다. 중간중간 발생하는 수확제나 무술대회 등을 통해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기도 한다.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 매달 혹은 매주 단위로 스케줄을 짜주어야 하며 딸이 18살 되는 해 어떤 능력치를 쌓았느냐에 따라 딸의 인생이 달라진다. 기사, 귀족 부인, 작가, 나무꾼, 마법사, 사기꾼, 여왕, 프린세스 등 8년 동안 키운 내 사이버 딸은 나의 프로그램에 따라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아서인지 자매 셋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나이 터울이 꽤 남에도 불구하고 나름 친한 사이를 유지했다. 요즘도 동생들은 가끔 자기들보다 나이 많은 사람의 조언이 필요하다며 나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온다. 그러고는 우다다다 말을 쏟아낸다.


어쩐지 아침부터 재택인지 물어보더라니, 점심시간쯤 둘째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은 얼마 전 국가고시에 붙은 상태였다. 고민이 없어보였는데 굉장히 뜬금없었다. 시험이 끝나고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상태가 되니 끊었던 담배가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사실 담배는 기호 식품이고, 성인인 동생을 떽!하고 혼내기에도 어려운 주제였다. 그렇지만 내 동생은 무엇이든 극단적이어서 늘 문제였다. 술을 먹어도 필름이 끊길 때까지 먹고, 담배도 피기 시작하면 줄담배를 폈다.



"언니. 나 스트레스가 안 풀려.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싶다구! 끊은 거 아까워서 참고 있긴 한데.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그냥 그대로 자면 소원이 없겠어."



"이거 완전 불량아 상태네. 이러다 떠돌이 마법사 되겠어."



"ㅋㅋㅋㅋ소현이 말하는 거야? 정말 그러네?"



육성 게임을 할 때마다 동생들은 꼭 캐릭터에 김소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의 이름을 한 글자씩 넣은 우리들만의 이름이었다. 나는 동생의 말에 큭큭대며 말을 덧붙였다.



"소현이처럼 언니가 스케줄 짜줄게. 소현이 불량아 상태 풀 때처럼 해봐. 바캉스 가거나 너한테 주는 선물을 사거나. 보아하니 체력하고 도덕성이 좀 부족해 보이는데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엄마 보러 본가도 좀 다녀와."





동생과 전화를 끝내고 한참 생각했다. 아직 아기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 아기가 태어나도 똑같을 것 같다. 나는 나를 평생 책임지고 키워내야 한다. 먹고, 자고,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내가 프린세스 메이커 속 소현이를 키우는 것처럼 생활한다면 그야말로 목표지향적 삶이 아닐 수 없다.


매일매일 계획을 짜고, 체력이 떨어진 것 같으면 운동하고, 기품이 부족하다 싶으면 영화 보고. 그러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바캉스도 가고, 휴식도 하고.


이전에 상담을 받았을 때도 선생님에게 비슷한 개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기 자신, 자기 감정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했을 때 객관적으로 이를 바라볼 수 있고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고 말이다.


굳이 프린세스 메이커와 인생의 다른 점을 찾자면 저장이 안 된다는 점이다. 게임에서는 계획을 실수로 짰거나 무사 수행에서 딸이 죽어버리면 다시 저장한 파일을 불러올 수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게임을 할 때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이 부여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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