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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Dec 26. 2023

오징어 게임을 이 악물고 보지 않는 이유

긴 프로젝트가 끝났고 긴 휴가를 받아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왔다. 우리 가족은 주로 범죄를 주제로 한 재연 드라마를 밥친구로 삼는다. 오늘은 "이것이 실화다"라는 프로였는데,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금발의 여인을 만나고 싶었던 남자가 결혼정보회사에 거금을 주고 외국인 여자 결혼을 한다. 그런데 여자를 실제로 만난 남자는 그녀의 외모에 크게 실망한다. 남자는 일부러 그녀에게 한글을 잘못 가르쳐 주고, 급기야 여자를 몰래 시장에 버리고 온다. 하지만 갖은 노력 끝에 여자는 집에 돌아오고, 남자는 반성하는 척하며 1년간 여자와 알콩달콩 산다. 이야기의 결말은 여자의 죽음이다. 심지어 그녀의 죽음은 남자가 친구에게 교통사고를 사주한 것이었다. 범행은 여자가 죽기  달 , 남자가 같은 결혼정보회사에 또 의뢰를 한 것이 드러나며 밝혀졌다. 지난번과 달리 남자가 요구한 조건에는 두 가지 항목이 추가되었다. 금발, 키 165cm 이상, 몸무게 55kg 미만.



엄마와 동생은 갖은 욕을 해댔다. 나는 욕을 배경 음악 삼아 밥을 먹으며 낄낄댔고 이야기가 마무리될 쯤 우리의 식사도 끝이 났다. 오랜만에 같이 이야기하며 TV를 보니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동생이 닭강정을 데워 줄 테니, 자기와 오징어 게임을 봐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혼자 보라고 했지만 동생은 초등학생이 된  마냥 발라당 누워 시위를 시작했다.


"싫어."를 외치고는 대신 타협점으로 동생이 좋아하는 심야괴담회를 같이 봐주었다. 혼자 봐도 되는데 왜 이렇게 같이 보는 걸 좋아할까. 틱틱대면서도 아직도 나를 따르는 동생의 아기 같은 모습이 내심 귀여웠다.


심야괴담회를 2화 보고 만족한 동생은 서비스로 이불을 깔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린 어릴 때부터 침대를 내버려 두고 막내까지 쪼르르 셋이서 거실 바닥에서 자는 걸 좋아했다. 엄마가 깨끗하게 빨아 놓은 이불에서는 따뜻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언니, 오징어 게임 보기가 그렇게 싫어? 엄청 재밌대."



"나는 그냥 싫더라. 왜 그런지 모르겠어. 뭔가 막 사실 인간의 본추악하다!!! 이걸 봐라!!! 이러는 게 싫은 것 같기도 하고."



"에이 그럼 이것은 실화다나 실화탐사대나 막 현장취재 이런 것들은? 그것도 다 나쁜 사람들 나오는 거잖아. 언니 그런 건 좋아하잖아."



"그건 그냥 사실 전달이잖아. 뉴스 같은 거지."



"언니 근데 오징어게임 보지도 않고 그렇게 판단하는 게 어딨어? 다른 사람들 얘기만 듣구 언니 맘대로 결론 내린 거잖아. 완전 색안경쟁이네."



"그건 네 말이 맞네. 비판을 해도 보고 해야 되는데."



나는 깔끔하게 논리의 오류를 인정했다. 내가 인정하자마자 동생은 같이 보자며 내 몸을 마구 흔들었고, 나는 메모장 어플에 "다음에 꼭 같이 보겠습니다."를 자필로 남긴 후에야 동생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인간의 본능을 밑바닥까지 드러내 보이는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은 추악한 본능을 지녔다, 인간은 이기적이었다와 같이 결론 내려지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보지 않고 섣부른 판단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만, 오징어 게임은 완벽하게 내 거부감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한 공간에 가둬진 채 상금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니.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평이다.


왜 인간의 본능을 파헤쳐야 할까. 인간 본능만을 따르던 태초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인간다워지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문명을 발전시켜 왔는데.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화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고 그런 결과물이 현재이다.


도덕 교과서에서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을 "도덕적 존재"라고 설명한다. 도덕 교과서에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든 예시로 이솝 우화 속 한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하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목욕탕에 사람이 많은지 보고 오너라."


목욕탕 앞에 도착한 하인은 문 앞에 크고 뾰족한 돌이 박혀있는 것을 보았다. 목욕탕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지나며 돌에 넘어질 뻔 하지만, 욕하고 짜증만 낼뿐 아무도 그 돌을 치우지 않는다. 한참 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돌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이내 그 돌을 뽑아 다른 곳에 놓고, 목욕탕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본 하인은 주인에게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고 말한다.


본능적으로 짜증 내는 것이 당연하고 내가 다친 상황만이 화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거역하는 행동들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가 먹어서인가.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추악한 본능을 보는 것보다는 인간으로서의 특징을 잃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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