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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Jan 04. 2024

마침내 평범한 1월 2일

죽은 아빠를 보내며

2024년 1월 2일
아빠가 죽은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2014년, 아니 그날은 장례식장이었으니 정확하게는 2015년부터 매년 1월 2일의 나는 늘 똑같았다.



12월 31일에는 1월 2일의 휴가 신청서를 내고, 1월 1일에는 본가에 내려간다. 간단하게 제사를 지내고 다 같이 아빠의 유골함이 있는 곳으로 간다. 엄마가 우울해하지 않도록 차에서는 주로 노래를 부르거나 쉴 새 없이 떠든다.



엄마가 근무하는 학교가 나올 때쯤이면 풍경은 완전한 시골이 되어있다. 탁 트인 밭이 나오고, 높이가 낮은 아파트들과 오래된 집들이 보인다. 농협이 보이고, 군데군데 경운기들이 있다.



직진만 하다 우회전을 하는 순간 급격하게 길이 좁아진다. 아빠의 장례식을 치렀던 장례식장을 지나면 길은 더 이상 아스팔트가 아니다. 차가 두 대 이상 지나가지 못하는 시골길. 조금 더 넘어가면 수많은 무덤과 표지판이 보인다. 가끔 엄마는 이곳을 지날 때 아빠도 화장하지 말고, 무덤에 묻을걸 그랬나 묻는다. 그럼 나는 늘 똑같이 대답한다. 저거 관리 어떻게 해. 그리고 아빠가 화장해 달랬아.



차를 대고 납골당의 2층으로 올라간다. 2층 맨 왼쪽 아랫칸에 아빠가 있다. 유골함에는 우리 가족이 다섯 명일 때 찍었던 사진들, 졸업사진, 나와 동생들이 쓴 편지, 이직할 때마다 넣은 명함, 동생의 대학교 합격증, 내 청첩장, 결혼사진 같은. 아빠 없이 살아온 우리의 인생이 들어 있다.



엄마는 유골이 들어있는 칸의 유리를 손으로 슥 닦는다. "A 아빠 우리 왔어, 잘 지냈어?"



엄마의 말을 들은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인다. 아직도 뭔가 말하려고 하면 눈물부터 나서 그냥 눈을 꼭 감고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눈을 크게 떠 눈물을 지우고, 유골함 칸에 붙어있는 사진 속 아빠를 본다. 밝게 웃는 엄마아빠 그리고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이었던 나와 동생들을 본다. 최대한 뇌에 박히도록 다섯 명이었던 우리를 눈에 담는다.






큰아빠, 작은 아빠, 아빠, 친척오빠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선산의 무덤들을 벌초하던 날이었다. 나는 친척언니들, 동생들과 함께 그 모습을 구경하며 팔자 좋게 돗자리에 누워 젤리를 먹고 있었다.



"아빠 힘들지? 뭐 도와줄까? 막걸리 따라줄까?"



"누워서 젤리 먹지 말고 노래나 불러 줘~"



"큰아빠한테 혼나면 어떡해. 큰아빠 엄청 힘들어 보여."



"그래도 해야지. 딸 근데 혹시라도 아빠가 간지나지 않게 죽는다면 네가 아빠 멋 좀 지켜줘. 벌초 같은 건 우리 공주들 힘드니 아빤 화장해."



"으 무서워. 그리구 그런 얘기하지 마. 아빠 백 살까지 산다매."



"한 줌 가루가 되는 거 멋있잖아. 그래야 미련도 안 남지. 혹시 치매 걸리거나 식물인간이 되면 그냥 안락사시켜. 그때쯤은 안락사가 되지 않을까. 공주야, 아빠는 간지 빼면 시체잖아."







내 머릿속, 가슴속에 꽁꽁 숨어 있는 아빠는 기일 즈음 벌컥 문을 열고 나를 잠식한다. 나는 홀로 견뎌야 하는 이 기간을 아빠강점기라고 명명했다. 이때쯤 나는 밤낮 가리지 않고 하늘을 많이 보고, 잠이 오지 않아 늘 새벽 네다섯 시까지 눈을 뜨고 있는다. 일부러 몸을 힘들게 하려고 이것저것 청소도 하고 돌아다녀 보지만 소용이 없다.

 


운전하는 아빠, 요리하는 아빠, 강아지와 산책하는 아빠, 눈썰매를 끌어주는 아빠, 노래하는 아빠, 나를 쳐다보며 웃는 아빠, 나와 TV보던 아빠, 중환자실 안 아빠, 수의를 입은 아빠, 한가득 차오르는 아빠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물밀듯이 아빠가 밀려왔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1월 2일에 휴가 쓰냐고 묻는 B에게 별생각없이 쓰지 말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꼭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회사에 휴가 신청서를 쓰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심플하게 말했다.



"이번엔 주말에 내려 가려구."



"그래, 편할 대로 해."



12월 30일, 시험에 합격한 둘째 동생의 축하파티를 했고 저녁을 먹으며 소소한 얘기를 했다. 납골당에 다녀오려 했지만, 눈이 너무 많이 와 갈 수가 없어서 그대로 다시 집에 올라왔다. 이번에 못 봤으니 다음에 내려 아빠 보러 가야겠다.



12월 31일, 1월 1일. 다른 날과 똑같이 평범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새 다이어리를 고 작심삼일이 될 수도 있을 결심들을 다.



1월 2일. 2014년 이전의 내가 그랬듯 평온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오랜만이었다. 출근했고, 회사 사람들과 밥을 먹고, 웃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밤에는 아빠가 생각나 매일은 아니어도 종종 잠을 설친다. 새벽에는 늘 울어 당장 오늘만 해도 좀 부은 채로 출근했다. 아빠강점기 시즌에는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 평소와 다른 패턴이다. 어떤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고, 아빠의 죽음을 온전히 극복한 것도 아니다. 깊이 생각하고 이번엔 다르게 보내보자, 극복해 보자 결심한 것도 아니다.



죽음의 5단계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라는 학설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닌가 보다. 역시 똑똑하신 분들이 만드신 것이라 다르다. 나는 자연스럽게 마지막 단계에 진입한 것일까.




아빠는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올 수 없다. 어떤 초자연적인 것도 아빠를 잃은 나를 2014년 이전의 나로 돌릴 수 없다. 이 명확한 진리를 10년 만에 인정하게 된 것이다.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갑자기 행복해지거나 하진 않았다. 여전히 아빠의 죽음은 나에게 큰 아픔이자 상실이다. 사실 평생 내가 안고 갈 슬픔이지 극복하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다만 적어도 1월 2일에 웃는 나를 보며 죄책감은 가지지 않게 되었다. 아빠가 죽었어도 남은 나는 행복해도 되고, 웃어도 괜찮았다. 하늘에 있는 아빠도 슬퍼하는 나보단 웃고 행복해하는 나를 더 좋아할 테니 말이다.



내가 너무 슬퍼해서 아빠가 구천을 떠돌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사후 세계가 어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아빠가 가벼운 마음이 되었길 바란다.



아빠가 떠나 있는 곳에서 언젠가 만날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2024년의 시작이 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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