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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Dec 12. 2023

과거의 흔적-'레가토'

[서평] 레가토 - 권여선

사르트르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인생은 B와 D 사이에 있는 C이다.”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사소하게는 출근할 때 신을 신발을 정하는 것, 크게는 인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것까지. 크고 작은 선택들이 얽히고설켜 이어진 채 인생의 커다란 흐름이 만들어진다.




책의 제목인 ‘레가토’는 음표를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기보법이다. 작가는 소멸하는 앞의 음과 개시되는 뒤의 음이 겹치는 순간의 화음처럼,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시간이 겹쳐 뭔가를 만들어내는 레가토 독법으로 읽히기를 소망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책 속 핵심 인물들은 과거 ‘카타콤’이라는 서클에 소속되어 있던 학생들이다. 그들은 치열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쳐 현재 중년의 정치인, 출판사 사장, 국문학과 교수, 국회의원 보좌관 등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다. 평화롭던 그들의 삶에 실종된 동기의 동생이 나타나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얽히고 이어진다.     






‘레가토’

이 책만큼 제목이 내용을 관통하는 책도 없는 것 같다. 하연의 존재, 인하와 하연이 만나게 된 계기,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듣는 인하와 정연, 에르베와 정연의 만남 등등. 그 어느 것 하나 가벼이 지나갈 수 없다.

불교의 기초 사상인 ‘연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모든 것은 서로의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며, 과(果)가 된다.        



   

‘폭력’

레가토만큼은 아니더라도 책을 관통하는 요소는 폭력이다. 운동권,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성폭력까지 직간접적 폭력이 군데군데 나타나있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폭력 간에 직접적인 연결은 없어 보인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라는 점이 인하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결말도 폭력적이었다. 이렇게까지 과도한 서사로 결말을 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상투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결말 속 정연이의 30년은 어땠을까.          


     



사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모든 시간이 첫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은수는 생각했다. 이십 대도 처음이었지만 오십 대도 처음인 것이다. 인생에 두 번째란 없다. 그래도 만약 두 번째의 이십 대가 온다면 링에 모인 이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292p.

    


짧은 동안 일어난 몇 가지 단편적인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 후의 기나긴 청장년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었다. 하룻밤의 방황이 창녀와 부랑아를 만들고, 한번 발각된 도둑질이 전과로 점철된 인생을 부른다. 편재하는 우연이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 그런 의미에서 스무 살 청춘에게 허여된 한 달 또는 반년의 말미는 필연의 첨탑을 쌓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했다.
390p.





과거와 현재를 끊지 않은 채 읽어줬으면 한다는 작가의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잃어버렸는지도 까먹은 어버린 과거 나의 흔적이 언제 현재의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노릇이다. 잊고 살았던 인하의 기억이 느닷없이 인하의 평온한 삶을 습격한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꽤나 고달프다. 우연과 필연이 얽혀 있는 삶 속에서 나도 언젠가 뒤통수를 맞는 상실을 겪는 일이 생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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