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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Feb 17. 2024

게으름 감옥에서 벗어나기

파이어족이 될 건가 봐요 - 시간 관리 편

긴 시간 연애를 했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또 다르게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퇴근하고 내가 만든 저녁을 먹으며 함께 야구를 봤다. B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소파에 널브러져 B가 보지 못하는 야구 장면들을 떠벌떠벌 중계했다. 설거지를 끝내면 함께 남은 야구를 보았고, 야구가 이긴 날엔 끝나고 하이라이트까지 야무지게 몰아봤다. 야구가 끝나면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고, 씻고 침대에 누워 거의 시간을 떠들었다. 그리고는 B의 팔을 베고 각자 유튜브를 보면서 낄낄대다 잠에 들었다.


주말에는 느지막이 11시쯤 일어났다. 평일에는 요리를 했지만, 주말에는 배달을 꼭 한 끼에 한 번은 시켜 먹었다. 함께 누워 배달 음식을 고르고, 배달 음식이 오고 나서야 힘들게 몸을 일으켜 밥을 먹었다. B가 밥을 세팅할 동안 나는 잽싸게 세탁기를 돌렸다. 밥을 먹고서는 둘 다 스르르 잠들고 또 일어나 먹고 스르르 잠들고의 반복이었다.


우습게도 어머님은 B를 게으르다며 베짱이라고 불렀고, 엄마는 나를 누워만 있는다며 뼈가 없는 연체동물이라고 불렀다. 나에게는 베짱이랑 같이 살아서 답답하지 않으냐, B에게는 연체동물이랑 살아서 움직이지도 않는데 답답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B와 나는 머쓱하게 "아니에요."라며 하하 웃었다. 왜냐면 우린 둘 다 똑같으니까.


아무튼, 결혼하고 나서 초기에 많이 싸운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싸울 건덕지가 없었다. 우린 싸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드러눕고, 더 떠들었으니 말이다. 이런 나날을 보내다 보니 나는 점점 동글동글, 토실토실해졌다. 그날도 누워있다가 문득,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B야, 나 살쪘어?"


"글쎄, 왜?"


"나 살찐 거 같애. 우리 같이 운동할래?"


"하면 좋지. 귀찮아서 그렇지."


"그건 맞아. 헬스장 이런 거 말고 그냥 산책이나 가자. 밥 먹고 바로 누웠더니 뭔가 더부룩해."




아마 이 날이 B가 조기 은퇴, 파이어 족을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시작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날 우리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손을 잡고 집 앞 공원을 한 시간 넘게 걸었다. 오랜만에 상쾌한 공기를 맡아서인지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까지 나왔다.




"A야, 우리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무슨 뜻이야?"


"너랑 보내는 시간은 늘 행복하고 즐거운데, 뭐랄까.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애."


"회사에서 너무 힘들어서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집에서는 쉬고 싶다더니, 이제 아니야?"


"그건 맞는데. 뭐라 하지. 얼마 전에 도파민에 관한 책을 읽어서 그런가. 우리 약간 도파민 중독 같애. 버리는 시간도 좀 많은 것 같고."




나도 B의 말에 크게 동의했다. 결혼하고 나서만큼 마음이 편했던 적은 없지만, 한켠에는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날 그 대화 이후로 B는 갑자기 시간 관리에 관한 유튜브를 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B는 생각이 미치면 무엇이든 학구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많은 자료를 살펴보고 본인의 행동을 정리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한참 동안 집에서는 시간 관리를 말하는 유튜버들의 소리가 들렸었다. 기간을 재보지 않았지만 체감상 2, 3주 되었던 같다.  




"A야, 오늘 카페 갈까."


"나 지금 침대에 붙어서 움직일 수 없는데. 이유 들어보고 정할래."


"내가 시간 관리에 대해서 이제 생각이 정리되었거든. 그래서 너한테 설명해주고 싶어. 그리고 같이 하자, 응? 따뜻한 라떼 먹으러 가자."



너무 귀찮았다. 커피는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데. 그치만 저렇게 구슬리면서 말하는 걸 보니 꽤나 중요한 것인 것 같아 순순히 따라 나갔다. 야무지게 다이어리까지 챙기는 B의 모습에 덩달아 나도 책 한 권을 챙겼다.





"A야, 직장인한테 회사에서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퇴근 후 집에 오는 시간, 저녁 먹는 시간, 씻는 시간을 제외하면 자기 전까지 길어봤자 두세 시간이잖아."


"맞아, 그래서 나 괜히 억울한 마음에 늦게 자고 그러잖아."

 

"그치, 책에서 봤는데 직장인이 자기 계발할 수 있는 시간을 골든 타임이라고 표현하더라. 이걸 보고 나서 지금 우리를 생각하니까 우리는 골든타임을 그냥 버리고 있더라고. 뭔가 시간이 아까워."


"눕고, 놀고 이러니까?"


"응, 골든 타임의 반대말이니까 대충 '가비지 타임'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ㅋㅋㅋ쓰레기 시간? 맞는 표현이네."


"응, 그래서 나 이제 목표가 생겼어. 일명 '갓생 살기' 프로젝트거든? 골든 타임은 늘리고, 가비지 타임은 줄일 거야. 그리고 이 골든 타임에 뭘 할지는 또 찾아가야지."

*갓생: 신이라는 뜻의 '갓(God)' + 인생이라는 뜻의 '생(生)'의 합성어, 부지런히 사는 삶을 말함.




B는 정말로 실행에 옮겼다. 가끔 B는 AI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무엇인가 목적이 생기면 신기하게도 그 산출물은 반드시 나온다. 다만 목적이 없을 땐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지만. 아무튼 B가 나에게 내건 공약(?)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골든 타임 늘리기
 - 출퇴근길: 책 읽기
 - 퇴근 후: 책 읽기, 공부하기

2. 가비지 타임 줄이기
 - 디지털 디톡스: SNS 삭제, 유튜브 알고리즘 정리
 - 야구 생중계 보지 않기

그래서 실제로 산출물이 나왔느냐? 나왔다. 사실 B가 일명 '갓생 살기 프로젝트'를 선언한 지 약 3년이 되었고, 중간에 한 번 슬럼프가 와 1년 정도 중단되긴 했지만 꽤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1. 골든 타임 늘리기

B에게 회사에서 일할 때 '뽀모도로' 어플을 사용한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뽀모도로는 내가 고등학생, 수능 재수 때, 대학생 때 유용하게 쓰던 타이머이다.


뽀모도로의 기능은 단순하다. 설정한 시간 동안은 다른 것을 하지 않고, 딱 그 일에만 집중한다. 그 후 '띵' 소리가 나면 하던 일을 뭐가 됐든 놓아버리고 바로 쉬어야 한다.


나는 주로 50분 집중, 10분 휴식 시간을 설정한다. 10분 휴식 시간이 되면 내가 어떤 걸 하고 있었던지 간에 그걸 놓아버리고 멍 때리거나 카톡을 하며 머리를 식혀준다. 그렇게 리프레쉬를 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 놀랍게도 집중력이 더 올라가곤 했다.


나는 한 번 집중하면 너무 깊게 집중해 뒤의 일이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중간중간 내 집중을 끊어줘야 했는데, 그때 이 뽀모도로 어플이 유용했다.


B는 정작 이 어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시간 관리를 시작하며 이 어플이 다시 생각났다며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B가 쓰고 있는 뽀모도로 어플. 무려 유료 결제를 했다.





B의 출퇴근길은 왕복 두 시간 정도이다. 보통 B는 출퇴근 시간 동안 나와 카톡을 하거나, 전날 야구 영상을 보거나, 유튜브 혹은 웹툰을 보곤 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 꼬박꼬박 책을 읽기 시작했고, 어느새 꽤 많은 양의 책을 읽었다.

B가 사용하는 '북모리' 어플




2. 가비지 타임 줄이기

B는 매일매일 보던 야구 중계를 정말로 끊었다. 사실 아예 끊진 않았고 주말에는 함께 생중계를 보기도 했다. 대신 직접 야구장에 가는 횟수가 늘었다. 물론 그전에도 야구장을 자주 가긴 했지만. 매일매일 야구 중계를 보진 않고 하이라이트만 보거나, 다음날 스코어를 확인하는 형태로 우리의 야구 생활이 바뀌었다.


유튜브 알고리즘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전 B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B가 좋아하는 게임, 그 게임을 하는 유튜버, 야구에서 파생된 것들이 많았다. B는 알고리즘을 하나하나 보면서 본인 기준 쓸데없는 것에 '관심 없음'을 누르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정리를 하고 나니 B의 알고리즘은 부동산, 주식, 동기 부여 등이 지배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날 그 공원에서의 대화가 우리의 삶을 많이 바꾼 것 같다. 아무래도 B나 나나 범생이(?) 스타일이라 그런지 게으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조금씩 찔리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을 먹고 난 이후 주말 이틀 내내 누워있던 우리는 이틀 중 하루는 꼭 밖에 나갔다. 함께 카페에 가 책을 읽거나, 야구장을 가거나, 맛집을 찾아갔다. 물론 이틀 하루는 꼼짝 않고 누워 있긴 하다. 지극히 내향형인 우리는 충전을 해야 회사 생활을 있으니 말이다.


B가 옆에서 부지런히 갓생을 살아서인지, 덩달아 나도 이것저것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기도 했다. 그런 걸 보면 내가 B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근거가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내가 B를 사랑한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B를 볼 때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 B가 노션에 세운 인생 계획 중 2024년에 해당하는 파트이다. B는 istp인데 특정 부분에선 지독한 계획형의 성향을 보인다.

다다음 화 쓸 때쯤 블러 지우고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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