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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으면 뭐 큰일 나니?

나를 키우려고 합니다.

by 크런치바

나에게는 별거 없지만 별거인 것이 있다. 바로 '씻기'다.


분주한 아침을 모두 마무리하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난 뒤 컴퓨터에 앉았다. 글을 쓰고 싶은데,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는 아침이다. 그럼에도 쓰고 싶어서 키보드를 만져도 보고 째려보기도 하니, 불현듯 나의 '씻기'가 생각이 났다.


아침이면 나는 오늘 하루 일정들을 떠올리고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정리한다. 그런데 요즘 그 스케줄 중에 꼭 넉넉히 배정하는 시간이 바로 씻는 시간이다. 특히 외출 전 씻고 준비하는 시간이 특히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잘 씻고 나가면 좀 자신감이 생긴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쓸데없이 신경 쓰이거나 혼자 위축되는 것들을 막을 수 있다.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모두가 그렇듯 엄마 씻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나도 그랬다. 거울을 보거나, 밖에 나가서 깔끔한 친구들을 만나면 여지없이 나는 쭈그러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나에게도 시간이 생겼는데 그때는 또 나도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아마도 보상심리였던 것 같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백수의 시계는 어쩜 그렇게도 빨리 가는지... 잠깐 소파에 누워있음 아이들 올 시간이 되었다. '5분만.' '진짜 딱 5분만!' 하다가 헐레벌떡 뛰어나가는 일도 많았다. 대충 세수하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아무 옷이나 걸치고 나갔다. 그렇게 나가서 할 일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며 하루를 보냈다.


이까짓 거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면 좋았을 것을, 깔끔하고 예쁘게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또 그걸 그렇게 부러워했다. '쟤는 어쩌면 저렇게 깔끔하고 예쁠까?' 만나는 내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상대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를 한 번씩 보면 머릿결은 푸석푸석했고 피부는 까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내 허연 발가락이 부끄러워 혼자 자꾸 꼼지락꼼지락 구부리며 가리다, 속으로 황당한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럴 바에 이제 좀 씻어라, 씻으면 뭐 큰일 나니??'


다시 떠올려도 그때 내가 참 어이없다. 그땐 마냥 늘어지는 나태함을 누려보고 싶었던 것일까? 분명한 건 만족도가 그렇게 높진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씻고 준비하는 시간을 꼭 넉넉히 배정한다. 바쁜 날이면 1시간 일찍 일어나 깔끔히 씻고 머리를 단정히 말리고, 얼굴에 로션도 꼼꼼히 챙겨 바른다. 그렇게 나와서 깨끗이 빨아놓은 옷을 입고 여유 있게 하루를 준비한다.


잘 씻는게 뭐가 그렇게 좋을까? 나를 스스로 잘 대해주는 기분이 든다. 잘 씻기고 정돈된 나를 보면 '오늘 하루도 잘 준비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오늘 하루 정도는 보낼 자신감을 충전한 느낌이랄까.


최소한 스스로 나를 쳐다보며 위축되는 일은 없다. 아무리 돌아봐도 내가 나를 방치하고는 마음이 쪼그라드는 일만큼 별로인 건 없는 것 같다.


오늘은 일을 쉬는 날이라 오랜만에 약속을 잡았다. 이제 씻고 준비해서, 오늘 하루도 잘 보내보자!


'오늘도 난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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