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다 할 수 없는 말
일요일 오전 Y의 가족 단톡방이 울렸다. Y의 시어머니께서 보내신 카톡이었다.
"아버지 발 부은 것이 가라앉지 않고 너무 심하셔... 배에는 가스가 차는지 임신 8개월 정도로 배가 빵빵하게 부어올라서, 키위를 드시고 그나마 조금씩 괜찮아지시는 것 같아."
Y는 가슴이 철렁했다. 시아버지께서 최근 발이 좀 부으셨던 것은 알고 있었는데, 배가 임신 8개월 정도로 부어 오른 일은 보통 일이 아니지 않은가!! 며칠 전만 해도 건강에 큰 문제가 없으셨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다급히 시댁에 전화를 드렸다.
많이 아프신 건 아닌지 겁도 났고, 자식으로서 죄책감도 일었다.
걱정된 Y가 다급히 물었지만 의외로 시어머니께서는 덤덤하셨다.
교회 예배가 끝나고 어머님은 김밥 한 줄에 떡도 드셨는데 아버님은 반 줄 정도를 드시고도 배불러하셨다고 했다. Y는 김밥 말고 아버님 배가 궁금했다. 한참 만에 시어머니께서는 시아버지 배가 임신 8개월 정도 된 사람처럼 빵빵하게 터질 듯 부어올라 식사도 잘 못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마른 체형의 시아버지께서 그 정도라면 당장 응급실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 Y는 애가 탔지만, 막상 얘기를 꺼낸 시부모님께서는 그럴 필요 없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일이라도 동네 내과를 가보시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다.
전화를 끊고 Y는 혼란스러웠다. 누구보다 건강에 애쓰며 주 1~2회 병원도 챙겨 다니시면서, 왜 이런 심각한 증상 앞에서는 전문 병원 진료를 받지 않으시는 것인지!
만약 정말 괜찮았던 거라면 왜 그렇게 자식들이 크게 놀랄 연락을 하셨을까?
병원을 모시고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Y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점심으로 제육볶음과 김치찌개를 만들었더니 시아버지께서 무척 맛있게 다 드셨다는 연락이었다.
'이렇게 식사를 하실 수 있다는 것은 괜찮으신 거잖아! 아니 근데 왜 저런 연락을 주신 거야, 자식이 얼마나 놀랄지 정말 모르셨던 걸까?'
한 주 전도 그랬다. Y의 시어머니께서는 시아버지 발이 부어 힘드시니 안부 연락을 하라고 하셨다. 1년에 1~2번 발이 붓는 증상이 있으신데 또 그 주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올해는 좀 더 붓기도 하고 동네 정형외과와 한의원 진료로 잘 해결되지 않는 듯했다. Y는 급히 시댁 근처 유명한 '발' 전문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을 해드렸다. 다음 날 어른들께서는 정밀 검사와 함께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오늘 Y는 시아버지의 사진을 받아보았다. 상황상 가보지 못했던 Y는 내내 마음이 쓰였는데, 시아버님의 배는 아무리 봐도 임신 8개월이 된 듯 한 배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시어머니께서는 Y에게 금방 좋아지셨다고 했다. Y는 다행이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Y는 걱정이 되지만 걱정이 안 되고, 진심이지만 온전히 진심일 수 없는 감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속지 않았지만 '또' 속았다고 생각했다. Y는 너무 하신 것 아니냐고 남편에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들을 간신히 참는 남편이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짠해서 화도 낼 수가 없다.
Y의 시어머니께서는 무척 밝고 좋은 분이시다. Y는 그런 시이머니가 참 좋았다. 지금도 Y에게 특별한 잔소리조차 하지 않으신다. 그저 유일하게 '효'와 '챙김'을 바라실 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식이 느낄 수 있는 '정'이라는 사랑은 별로 주신 적이 없다. 일방적인 사랑만 바라는 것만 같아, Y는 늘 마음이 온전히 진심일 수가 없다.
Y는 결혼과 동시에 시부모님의 변비 고충을 알게 됐다. 변비는 물론 시시콜콜한 건강 이슈들과 시부모님의 경제 상황이 늘 주요 대화 주제였다. 하지만 시부모님들께서는 Y 부부의 고충이나 삶의 애환은 잘 모르셨다.
Y는 큰 아이 돌이 막 지났을 때 첫 전셋집에서 갑작스레 쫓겨나게 됐다. 전셋집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던 그 시절, Y는 추운 겨울 아기를 안고 집을 구하러 돌아다녀야 했다. 시어머님은 울먹이는 Y에게 "나는 자가만 살아봐서 전세는 잘 몰라."가 끝이었다.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을 키웠지만 Y는 시댁에서 육아 도움을 받은 적은 없었다. 작은 아이가 아기 때 감기 바이러스에 걸렸는데, Y의 시아버님께서는 바이러스가 옮을까 봐 아이를 멀리 하셨다. 보행기에 앉혀두라고 하셨던 말씀이 Y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큰 아이가 팔을 크게 다쳐 모두가 잠 못 이루던 시간이 있었다. 두 달 여 만에 깁스를 풀었을 때도, Y의 시어머니는 깁스를 푼 것조차 알아보지 못하셨다.
Y의 친정어머니는 Y의 육아를 도와주다 크게 다쳐 7~8년의 세월 동안 편찮으셨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프셨는지, Y의 시어머니께서는 결국에는 제대로 기억을 못 하셨다.
생전 푸념이란 걸 하지 않는 남편이 회사가 정말 어려웠던 시기에 시어머니께 요즘 힘들다고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힘든 게 좋은 거야." 정말 이게 끝이었다. 깊은 대화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Y의 시어머니께서는 둘째 아들과 Y의 가정에 이런 일들이 있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무 일방적인 사랑을 원하시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Y의 남편은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래서 외로웠다고 했다. 부모님께 화도 내고 거리도 둬 보고, 웃으면서도 노력해 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Y는 남편에게 더 그러지 말라고 했다. 달라지는 것 없이 혼자 애쓰는 남편이 너무 애틋했다. Y가 대신 잘 마음먹고 잘하며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Y는 이제 적정하게 잘 지내는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시부모님의 연락과 함께 Y의 마음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임신 8개월처럼 배가 불렀다'는 말로 자식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시어머니가, 몇 백번을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바라기만 하는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부모를 탓할 땐 반드시 죄책감이 뒤따르니까.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다고! 내 남편의 부모님이신데!'
Y는 오늘 밤 시부모님께서 이런 면이 있을 뿐,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Y의 속이 꽉 막힌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도 부모도 누구든 사랑은 주고받아야 한다.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기만 하는 사랑은 없다. 그 사랑은 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Y의 부부가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부모에게 기다렸던 것은 관심과 정이었다.
이 순간에도 남편이 걱정되는 Y.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일 수도, 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