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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늘 같은 날, 허무했을 거다.

나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by 크런치바

어제 퇴근하고 온 남편과 함께 늦은 저녁 친한 가족의 초대를 받아 시골집으로 향했다. 어둑어둑한 밤, 시골집 마당에 모여 고기를 구워 먹으며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꽤 오랜만에 가져본 시간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 우리는 오늘 김포에서 아침을 시작했다. 오전 10시쯤 일어나 부지런히 집을 치우고 나왔다. 근처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고, 강화도 교동으로 향했다.


전통 시장 구경도 하고, 바닷가도 보고, 산에 올라 전망대 구경도 했다. 개방되어 있는 한 초등학교를 보자마자 아이들은 저기서 놀자고 했다. 차에서 야구 공과 글러브, 배트를 들고 나와 한참을 신나게 야구 시합을 했다. 어제 시골집 옆에서도 제법 진지하게 진행됐던 야구 시합은 오늘도 계속됐다. 전지훈련 다니는 아이들 마냥, 이 뜨거운 여름 멀고 먼 강화도에서도 야구에 진심인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이 재미있어 우리는 그늘에 앉아 야구 시합을 구경했다. 고즈넉한 예쁜 학교를 보고 있는데 바람이 불었다. 땀 냄새가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이 무더위에 돌아다니며 어른이며 아이며 꼬질꼬질해진 모습에 웃음이 났다. 집에 갈 시간이 된 거다.


돌아오는 길 집 근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고 헤어져 돌아오니 저녁 8시였다.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역시 돌아오면 집이 최고다. 아무리 좋아하는 친한 가족이어도, 1박 2일을 같이 보내다 보면 적당히 어색하거나 서로 노력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긴장도 풀어지며 몸이 더 노곤했던 것 같다. 빨리 씻고 잘 생각뿐이다.


씻고 나오니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틀고 야구 경기를 보려고 모여 앉았다. 더는 아무것도 못하겠는데 다행히 저녁도 다 먹고 들어와 이제 더는 할 일도 없다. 이제 쉬다가 잘 일만 남았다.


바로 이런 순간, 이전의 나는 가끔 허무함을 느꼈다.


기껏 하루를 이렇게나 잘 보내놓고 대체 어떤 점에서 허무함을 느끼는지, 나도 이해가 안 되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랬다.


아마 즐거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잠시 잊고 지냈던 현실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놀기만 해도 되는지, 지금 이 시간에라도 무엇이든 하나 더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오늘도 나는 발전하지 못했다 등등의 생각이 내 발목을 잡았다. '이룸'에 대한 욕심은 커지고 결실은 대단치 않은 삶을 몇 년 보낸 그 끝자락에 이런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이런 마음이 꺼내지는 날이 있었다. 처음 남편은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 가족과 보내는 시간 만으로 내가 충분치 않은 것인지 걱정이 됐다고 했다. 그러다 내 얘기를 듣고 나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남편은 나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했지만, 그건 결국 누가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뭐라도 이루던지, 마음을 바꾸던지 해야 할 일이었다.


결국 나는 마음을 바꾸기로 결심했는데, 가짜는 아니었나 보다. 진짜로 나를 받아들이고, 더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아등바등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나 보다.


오늘 밤 그 허무함이 없었다. 느끼고 있으면서 숨기려는 것이면 이곳에라도 솔직히 쓰려고 노트북을 켰는데, 정말 없다. 오늘 하루를 잘 채웠다고 생각이 든다. 오늘은 우리가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날이다.


정말 결심을 했는지 여정 중에도 부지런히 움직여 이제는 슬슬 집에 가자는 마음이 없었다. 급하거나 조바심 나는 순간이 하루 중 없었다.


이 순간이 좋으면서도 또 다른 것이 신경 쓰이는, 마음 한편이 바쁜, 그런 내가 오늘은 아니었나 보다.


다행이다. 달라진 것이 나를 위해 좋은 방향인지 덜 발전적인 방향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결심했으니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데, 조금씩 내가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허무함 대신 느낀 충분하다는 감정이 새롭고 좋았다.


'아마 오늘 같은 날, 허무했을 거다. 그렇지만 오늘은 잘 채운 충분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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