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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오늘은 솔직해도 될까?"

못다한 이야기

by 크런치바

사실은 화가 났다.


아이한테 화가 난 듯했지만, 사실은 시댁이었다.


남편과 둘이 상의해야 할 일이 있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큰 아이는 우리 대화 내용을 궁금해했지만, 이건 우리끼리 나눌 이야기였다. 우리는 평소 "아이들 말고 어른들의 얘기야!"는 없기에 이해해 줬음 했는데, 아이는 오늘따라 유난히 끝까지 우리 얘기를 궁금해했다.


"너에게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야. 네가 이 얘길 들으면 너는 비밀을 지켜야 하거든. 어린아이한테 그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야. 전에 엄마가 딱 한 번 너한테 비밀 부탁했는데, 넌 그걸 못 지켰잖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비밀이 원래 어려워. 그래서 이건 우리끼리 대화할게. "


이해는 했지만 궁금증이 남았던 아이는 날 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그런 걸 왜 비밀로 해야 돼?"


또 할 말이 없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다고 얘기한 후 우리 대화는 답답함을 남긴 채 종료됐다.


화가 났다. 꼬치꼬치 묻는 아이에게 화가 난 걸까? 아니었다. 시댁이었다.


나는 자라면서 대단히 화목하지 않은 친인척 사이의 일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어른들이 속상한 마음에 여과 없이 꺼내놓은 이야기들이 어린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어디 가면 하지 말아야 할 얘기가 많았고 믿을 만한 친척이 없었다. '날 보며 건넨 이 친척 어른의 미소는 진심일까?' 고민하다, 미안한 적도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결혼하면 양가 어른들이나 친척들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정은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내 감정은 내 감정일 뿐, 아이들의 조부모와 친인척은 스스로의 것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가족 경험이 쌓였으면 좋겠고,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판단은 스스로 해야 한다. 필요 없는 부담감 따위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런 내가 아이들에게 비밀을 부탁했다. 아이는 이유를 물었지만 답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내가 아이들에게 부탁한 비밀은 얼마 전 우리가 떠난 일본 여행이었다.


5년 만에 가는 해외여행에 신난 아이들은 이걸 왜 친할머니 친할아버지께 자랑하면 안 되는지 의아해했다. 할아버지 건강 때문에 같이 못 가서 속상하실까 봐 그렇다고 둘러댔지만 그때도 아이들은 궁금증이 많았다.


오랜 시간 아팠던 외할머니한테도 별별 얘길 다 했는데 왜 안되느냐 궁금해했지만, 어영부영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얘들아. 왜 자꾸 비밀이냐고? 엄마도 오늘은 솔직하게 얘기해도 될까?


돈 때문이야! 우리에게 경제적인 효를 기다리는 부모님께 우리가 가끔 즐기는 여행조차 꺼내기가 어렵거든.


아들의 노년 복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할머니 셔. 본인 돌아가시고 돈 많이 벌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셔. 아마 다시 물어보면 농담이라고 하실 거야. 근데 엄마 아빠에겐 그게 결코 농담이 아니야.


결혼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우리 밥 사주신 일이 손에 꼽는데, 우리를 만날 때면 항상 드시고 싶은 식당을 예약해 두셔. 당연히 돈은 우리가 내야 해. 가끔 고급 랍스터며 한우 드시겠다고 하신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 때는 케이크에 파티가 당연한 거지만 엄마 아빠는 거의 받아보질 못했어.


빨리 우리가 성공해서 부모님께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고, 자식이 모시고 가는 효도 여행을 기대하셔. 우리를 만나면 줄곧 하시는 얘기는 늘 맛집 다녀온 얘기나 효도가 필요한 두 분의 상황이야. 근데 그거 알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우리보다 더 넓은 집에 사시고 더 자주 여행 다니시잖아.


왜 할아버지, 할머니께 얘기를 안 하냐고? 우리도 다 해봤지. 그런데 달라지지 않았어. 그래서 마음의 챙김이라도 받고 싶었는데, 사실 그런 경험이 없어. 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힘들어 울 때도, 육아가 힘들어 허덕일 때도, 힘든 일을 겪을 때도 늘 손을 내밀었는데 관심이 없으셨어.


그런데 문제는 엄마가 계속 얘기하면 너희 아빠 마음이 아프다는 거야. 이미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조절은 다 하고 있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엄마도 어른들이 원하시는 그런 것들은 잊고 진심으로 두 분을 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다행인 건 '효도'와 '챙김'을 빼면 두 분은 좋은 분들이야. 무엇보다 너희를 만나면 사랑의 눈으로 보시잖아. 엄마의 감정으로 너희가 어린 나이에 그 사랑을 받으며 고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너희가 커서 스스로 느끼고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해.


기왕이면 너희는 나와 큰 상관없이 그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이 잘 유지됐으면 좋겠어.


자, 이제 왜 일본 여행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는지 알겠지? 계속 부산이고 제주도고 모시고 여행 가기를 바라셨거든. 그런데 너희를 데리고 일본을 가기로 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 이런 얘기들을 너희한테 어떻게 하겠니.


너희도 답답하겠지만, 5년여 만에 너희를 데리고 외국 여행을 가면서 비밀이 새 나간 걸 수습해야 했던 엄마도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이해해 줄래? 성실하게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여행 가는데 왜 자꾸 숨겨야 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더 답답했거든.

비밀 따위 없이 아이를 키우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앞으로도 생길 것 같아. 엄마는 또 다르게 둘러대겠지만 다 커서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너희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래오래 좋았으면 좋겠어, 엄마처럼 말고.


'엄마도 비밀 없이 키우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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