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기억하는 감각이 있다.
세포 하나하나가 떠들썩하게 일어나 오소소 소름이 돋는 감각의 기억이 있다. 감각의 기억은 생각의 힘보다 강력해서 나를 사정없이 낚아채 한없이 흐릿해져 버린 시간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 순간에 던져놓는다.
보이지도 않는 세포 하나에 휘둘리는 불쾌한 기분에 무력감을 느끼며 멀뚱히 천장을 바라본다.
눈을 감으면 감각은 더 선명해지기 때문에 죄 없는 천장이 눈초리를 받아낸다.
내가 고통을 견뎌내는 방법이다. 그저 기다릴 뿐이지만 이보다 강력하고 분명한 방법은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집에서는 잠들지 못했던 시기가 있다.
반짝이는 시절이었어야 할 그때의 나는 지하철이건 버스건 남의 시선 신경 쓸 정신없이 숨죽이며 울곤 했다. 집에서는 벽장에 들어가 소리 없이 울었다. 그건 신음에 가까웠던 거 같다.
비명은 침묵했지만 앓는 밤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선 수업을 듣지 못하고 쪽잠을 잤다.
집이 아닌 어디든 집보다는 편했다. 집으로 들어설 땐 현관 앞에서 심호흡을 하며 한참을 서성이다 용기를 쥐어 짜내야 손잡이를 잡을 수 있었다. 사자 우리에 자의로 들어가야 하는 초식동물의 비애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고 밤이 늦어야 집에 들어갔다.
집에서는 잠들지 못했고 깜빡 잠이라도 들면 가위에 눌려 터질 듯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화들짝 깼다. 귀신이 아닌 사람이 나오는 걸 보면 가위가 아니라 악몽이었을까.
그리고 새벽이 오기를, 어서 밤이 지나가서 여기서 벗어나기만을 억겁 같은 시간을 세고 또 세며 기다렸다.
매 초를 무수히 쪼갠 조각을 헤아리며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온 방이 심장소리로 시끄럽게 요동쳤지만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하고 기다릴 뿐이었다. 혹여 작은 몸짓이 밤의 심기를 건드리면 영영 어둠에 갇혀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밤은 모든 이에게 공평한 평안을 주지 않았다. 차별적이고 선택적이며 잔인한 어둠일 뿐이었다. 밤이 가져다주는 악몽 없는 잠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특혜였다. 온 힘을 다해도 부족해 숨을 할딱이며 오늘 밤을 견뎌내어도 내일 밤은 한치의 예외도 없이 바짝 다가왔다.
나에게 밤은 천형이었다.
매일이 밤이었다.
수년을 그렇게 이어가니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평온을 찾지 못하고 고통만을 느끼는 망령이 된 것 같았다. 흐느끼며 둥둥 떠다녔다. 오랜 시간을 헤매다 보니 이유도 기억도 불분명해지고 오로지 고통만 남은 망령.
누군가 나를 위해 천도식을 해줄 것인가 틈만 나면 둘러봤지만 그런 은혜를 베풀 이가 쉬이 내 눈앞에 나타날 리는 없었다.
질량도 없는 주제에 밤새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것은 가벼운 빛의 입자에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흩어지고 밀려났다. 다음날 나를 또 찾아올 테니 잠시 숨은 거라고 봐야 할까.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에 인생이 송두리째 휘둘린다.
무거운 내 몸뚱이가 중력을 거슬러 한없이 얇아지고 옅어진다. 투명할 정도로 가벼워져서 한 줌의 바람에도 저항할 수가 없다.
산들바람조차 버텨낼 수 없는 내 영혼은 황무지의 그것인데 태풍이 휩쓸고 가기가 여러 번이라 상황을 수습할 틈도 없이 그다음 태풍이 휘몰아친다. 가끔은 예측할 때도 있지만 변화무쌍한 날씨는 예보 없이 닥쳐올 뿐이다.
자비를 모르는 바람은 바닥 끝까지 헤집어놓고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르쇠로 떠나버린다. 일말의 죄책감 없는 뒤꽁무니를 혼이 빠진 채 한참을 바라본다. 그리고 내 안을 바라본다. 부러지고 부서진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서 곧 무너질 움막을 짓는다. 얼마 버티지 못할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허름한 움막이라도 한 몸 뉘일 자리는 있어야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솜씨 없이 얹어놓은 지붕이 날아가고 기둥이 주저 않는걸 넋 놓고 바라보다 보니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시간은 공평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은 여러모로 잔인하다.
그래도 지금은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거나 뒤척거리며 자세를 바꿀 여유가 있다. 물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지는 않는다. 압박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내일이나 모레, 적어도 며칠 안으로 괜찮아질 거라는 부분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막연함만큼 불안감을 유발하는 건 흔치 않다.
끝없는 우주에 홀로 남은 위기상황은 두려움을 야기하지만 이제 나의 우주는 공허하지 않다.
남들과는 다른 시간의 속도와 효용에도 불구하고 황무지에 물을 떠다 나르고 이름 모를 풀을 가꾼다.
누구나 인정할 만큼 찬란하고 화려한 정원은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초록이 작은 호흡을 이어간다. 날숨에 뱉어내는 초록 입자가 새카만 우주를 밝힌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울창한 숲과 평안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내 삶이 다 할 때까지 언저리조차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망가져버린 것들을 온전해지도록 고치지 못할 수도 있다.
무너진 것들을 바르게 세우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고 이상해도 내 인생은 내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꼬질하고 볼품없어도 내 거라서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