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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시를 읽는 이유

by 차순옥



연말에 시를 읽는 이유

연말이 되면 말이 많아진다.

한 해 동안 하지 못한 말들, 미뤄두었던 설명들,

서둘러 정리해야 할 생각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든다.

그러나 마음은 이상하게도

말보다 침묵을 먼저 찾는다.


그래서 나는 연말이 되면

책장 한편에 꽂혀 있던 시집을 꺼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 하지 않는다.

단 한 편,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시 한 편이면 충분하다.


시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잘 살아왔나요?”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디쯤인가요?”


한 해를 돌아보는 일은

성과를 세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어디에서 아팠고,

어디에서 다시 일어났는지를 기억하는 일이라는 것을

시는 조용히 알려준다.


연말의 시는

위로를 서두르지 않는다.

괜찮다고 쉽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옆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나는 시를 읽고, 낭송한다.

소리 내어 읽는 시는

종이에 머물던 문장을

몸 안으로 천천히 들여보낸다.

호흡이 가라앉고

마음의 속도가 느려질 때,

비로소 한 해가 내 안에서 정리되기 시작한다.


김춘수의 시를 읽을 때면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올해의 나에게도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지 않을까.

잘 해낸 날도,

무너졌던 날도

모두 한 사람의 삶이었다고


연말에 시를 읽는 이유는

더 나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여기까지 온 나를

조용히 안아주기 위해서다.


올해를 잘 버텨온 당신에게

긴 설명 대신

시 한 편을 권하고 싶다.

말이 적을수록

마음은 더 깊어지니까.


연말이다.

시를 읽기에

그리고 나를 다시 만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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