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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조용히 마음에 온다

by 차순옥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세상은 갑자기 분주해진다.

반짝이는 불빛, 들뜬 음악,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크리스마스는 점점 소란보다

침묵에 가까운 얼굴로 다가온다.

어릴 적에는

무엇을 받을까를 기다렸고

젊은 날에는

무엇을 해내야 할지에 마음을 썼다.

그런데 지금의 크리스마스는

무엇을 더하지 않아도 되는 날,

그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 날처럼 느껴진다.

올해를 돌아보면

잘한 일보다

견뎌낸 날들이 먼저 떠오른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멈춰야 했던 순간들,

마음이 무너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나 자신이

조금은 대견해진다.

성경 속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늘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

말구유,

여관에도 방이 없던 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자리.

그곳에 예수님은 조용히 태어나셨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도 그렇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

가장 초라하다고 느꼈던 순간에

돌이켜보면 빛은 이미 와 있었다.

다만 그때는

그 빛이 너무 작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크리스마스는

잘 차려진 마음에 오는 날이 아니라

텅 빈 마음에도

기꺼이 찾아오는 날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 대신

이만하면 충분히 살아왔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고,

울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느리지만 끝내 여기까지 왔다고.

촛불 하나를 켜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올해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말없이 손을 잡아준 사람,

기도로 나를 품어준 사람,

멀리서도 마음을 보내준 사람들.

그들이 내게는

이미 크리스마스였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하루라기보다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다.

더 잘 살지 않아도,

더 증명하지 않아도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날.

오늘 밤,

세상이 조금 시끄럽더라도

내 마음만은

말구유처럼 조용히 비워 두고 싶다.

그 빈자리에

빛이 머물 수 있도록.

그것이면

이 크리스마스는

충분히 보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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