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쓰게 됐지만, 사실은 꽤나 오래전에.
집을 나와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함 때문이었을까. 혼자 사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그 솔직함은 자꾸만 글을 쓰자고 나를 부추겼다. 사실 이전에도 그런 충동에 휩싸여 글쓰기를 시도해 본 적은 있었으나, 번번이 '귀찮음'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채, 시도로만 남곤 했다. 글을 쓰기 전까지의 설렘은 노트북을 열자마자 권태로 뒤바뀌었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 권태를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결과 없는 시도만이 반복되던 때, 문득 글을 왜 쓰고자 하는지 스스로에게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우선 이유를 찾기로 했다. 구태여 이 고된 과정을 견뎌가며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 말이다. 그래야만 이 '귀찮음'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왜 쓰는가. 작가 '조지 오웰'의 에세이 제목이기도 하다. 책에서 오웰은 생계를 위한 이유를 제외한다면, 자신이 글을 쓰는 동기는 총 4가지라 말한다.
첫 번째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에 오르고 싶고,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그런 류의 이기심 말이다.
두 번째는 미학적 열정이다. 글로써 나타낼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말한다.
세 번째는 역사적 충동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기록하려는 욕구이다.
네 번째는 정치적 목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말은 광범위한 의미로,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또는 남들의 생각을 바꾸고자 하는 욕구를 말한다.
훨씬 소박하지만, 나 역시 그가 말한 동기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듯하다. 특히 첫 번째 이유를 읽을 때는 꽤나 뜨끔했다. 사실 나는 글을 쓰는 데, 이기적인 이유가 가장 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글은 대체로 나 스스로를 위한 글이었고, 지금 쓰고 있는 글도 마찬가지다. 물론 오웰이 말한 이기심과 내가 말한 이기심은 그 결이 약간 다르긴 하다만. 어떤 이기심을 말하는지,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선 글쓰기에 대한 나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이야기하는 게 좋을 듯하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버이날이었나, 선생님께서 숙제로 부모님 안마를 해드리고 그 소감을 작성해 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한창 부끄럼도 많고, 귀찮기도 했던 당시의 나는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안마는 하지도 않은 채, 어디서 주워들은 여러 표현들을 짜깁기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 선생님이 엄청 감동을 받으셨다며 내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었다. 얼떨떨한 채 일어난 나는 친구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교실 앞으로 나아갔다.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은 친구들의 동경과 선생님의 애정 어린 눈빛 속에서 한 발, 한 발 뿌듯함과 기쁨으로 바뀌어 나갔다. 그 감정이, 기억이 꽤나 좋았었나 보다. 그때부터 아마 글쓰기와 눈이 맞았던 게 아닐까.
우연인지, 인연인지 그 뒤로도 인문학을 중요시하는 학교에 진학해 글을 참 많이도 썼다. 잘하는 게 별로 없는 내가, 인정받은 몇 안 되는 분야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을까. 글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게 좋았다. 비교적 말을 잘하지 못했던 내 성격 탓도 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모를까, 짧은 시간 안에 상황을 판단하고 생각을 정리해 내뱉어야 하는 말은, 순발력이 부족한 나와는 상극이었던 셈이다. 감정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도 큰 걸림돌이었다.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해 항변할 때도, 감정이 북받쳐올라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적이 부지기수다. 그러곤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자기 전에 그때의 상황을 곱씹으며 내뱉어야 했을 말들을 머릿속으로만 되뇔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시간을 두고 쓸 수 있고, 후에 수정할 수도 있는 글은 언제나 편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안식처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쓰다 보니 글이 조금씩 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그 기분이 좋아 더 열심히 글을 썼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온전히 내 자유의지였던 적은 많지 않고, 대부분이 '써야 하는' 글이었지만, 나는 그 과정 자체가 좋았나 보다. 글을 쓰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이 좋았고, 그 생각들을 정리해 차근차근 글로 풀어내는 게 좋았다. 눈송이처럼 내 머릿속을 그저 떠다니던 생각들을 하나로 뭉쳐 멋진 눈사람을 만들어내는 기분이었달까. 그렇게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다 보면 어느샌가 내 머릿속은 온통 함박눈으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썼던 글이었는지 몰라도,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아직까진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글'만 한 것을 찾지 못했다. 글은 나를 훨씬 풍성하면서도, 정교하게 만들어 준다. 쓰다 보면 기존의 생각들이 깊어질 뿐 아니라, 새로운 생각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난다. 또한 글쓰기는 내가 계속 이상향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내 유약한 성격 탓도 크지만, 현실을 살아간다는 건 타협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삶 속에서 글쓰기는 내 도피처이자, 재정비의 공간이다. 글은 항상 현실에 뿌리박고 있어야 한다지만, 그래도 때로는 붕 뜬 소리가 허용되는 공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의 글은 현실 속 초라한 나에 비해 훨씬 이상적이고, 고상하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모습이 괴리적이고, 위선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글이 주는 이러한 간극이 좋다. 아니, 오히려 그 간극을 위해 글을 쓴다. 저 멀리 글을 던져놓으면, 그 글이 항상 앞서서 나를 견인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 속에 순응하고 타협해버리고 만 가치들, 지금껏 배워왔던 소중한 가치들이 그냥 사라지지만은 않게, 글에 담는다.
내가 이기심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첫 시작은 오웰이 말한 이기심, 칭찬과 인정의 욕구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정말 나 스스로를 위해 쓴다. 글을 통해 보다 나아가고, 성장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자유의지가 샘솟는 걸 느낀다. 읽는 것 만으론 부족하다. 머릿속을 떠다니던 눈송이들은 한순간 바람이 불면 다 흩어져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떠오르는 생각과 흘러가는 순간들을 그저 바람에 흩날리게 두고 싶지만은 않아서, 그것들을 한데 뭉쳐 눈사람으로 남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오웰은 글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는지 모른다. 세상에 깊은 의미와 영향을 지니면서도 아름다운 글, 모든 글쟁이들의 바람이 아닐까.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오웰은 그 꿈을 이뤘다. 내가 지금껏 읽어온 그의 글은 깊은 의미를 지니면서도 굉장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가능하다면 그를 따라가고 싶다. 나의 글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 작은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란 것을 안다. 많이 부족하다. 우선은 나 자신을 바꾸고 싶다. 또 지키고 싶다. 나를 지키고 싶다는 표현이 너무 나르시시즘적 일진 몰라도, 내 안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것들이 있다. 몇 안되지만, 글을 씀으로써 그것들을 지키고 싶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선, '더 좋은 나'가 되는 것이 보다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길이란 걸 알기에. 그게 바로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나의 글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나의 글이 다른 누군가의 개화(開花)를 돕는 꿀벌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