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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Feb 21. 2023

이토록 차가운 사랑의 단면

 <그 겨울, 나는>


 이따금 시놉시스만 보고도 확 끌리는 그런 영화들이 있지 않은가. 내겐 <그 겨울, 나는>이 그랬다. 특별할 것 없는, 20대 취준생 커플의 뻔한 사랑과 역경의 이야기임에도, 이 영화를 꼭 봐야만 할 것 같았다. 뜬구름 잡는 멜로 영화가 아닌,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에 목말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시작은 영화와 같을지 몰라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까지, 그 과정은 결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고 사랑에 냉소를 품은 것도, 품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이 마냥 영화 같지만은 않다는 것.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상적이려 부단히 노력하지만, 결국 넘지 못할 벽 앞에서 탄로 나 버리고 마는. 


 영화가 이러한 현실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서 좋았다. 물론 '현실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겠지만, 내게는 이 영화의 사랑이 현실과 보다 가까웠다. 사랑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또 다른 매력이다. 남주 '경학'의 삶을 뒤따라가며 사회의 불편한 아픔들을 마주하는 것도, 그만의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본 글부터는 영화 <그 겨울, 나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경학'과 '혜진'은 동거하며 취업 준비를 함께하는 커플이다. 둘 모두 넉넉지 않고, 사랑하기 참 어려운 때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들의 사랑에도 균열이 찾아온다. 2,000만 원이었다. 경학에게 어머니가 남기고 간 빚 2,000만 원을 갚아야 한다는 전화가 걸려오고, 그들의 사랑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매달 100만 원이 넘는 돈을 은행에 상환해야 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경학은 준비하던 경찰 공무원 공부를 그만두고 배달 일을 시작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경학을 돕기 위해 혜진도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도움을 주려는 혜진에게 경학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 


"내가 알아서 할게. 넌 신경 쓰지 마."


 물론 그 말은 여자친구의 취준을 돕지는 못할 망정, 걱정거리만큼은 안겨주고 싶지 않은, 남자친구로선 최선의 말이었을 것이다. 분명 따뜻한 배려의 말이었다. 처음에는. 하지만 똑같은 말임에도, 그 의미는 점차 변질되어 갔다. 후에 그 말은 알아서 할 방법이 없음에도 그저 내뱉는, 경학의 단순 자존심이고, 고집이었다. 도움이 절실함에도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는, 날이 선 짜증이었다. 경학의 그 말 앞에서 혜진은 어느새 오지라퍼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혜진이 취업에 성공한다. 꿈꾸던 직장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직장인이 된 혜진은 취업준비마저 때려치운 배달기사 경학과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점점 멀어져만 간다. 그 격차를 극복해 보려는 혜진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랑은 이미 망가져있었다. 아마 둘만 몰랐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이었다는 눈가리개 때문에. 점차 그 안대가 벗겨지고, 현실을 마주했을 때, 결국 경학과 혜진은 이별한다. 




 '경학'이라는 한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이 굉장히 흥미롭다. 영화 처음과 끝의 경학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결코 부자연스럽진 않다. 사실 어쩌면, 경학은 변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포장되어 있던 경학의 부족한 모습들이 빈곤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이라면, 본래 경학에 대한 지나친 모욕일까. 경학이라는 한 인간을 욕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지 못한 면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를 둘러싼 환경에 따라 그런 면들이 드러날 수도,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빈곤이라는 환경은 십중팔구 인간의 좋지 못한 면을 부각한다. 특히나 그 빈곤으로 나를 둘러싼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경우라면 더더욱. 

 

 경학의 안타까운 상황과는 별개로, 혜진은 정말 좋은 여자친구였다.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었을 만큼. 그녀는 줄 수 있는 모든 걸 주려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받는' 경학의 마음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도움은 '주는 사람'과 동시에 '받는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는 사람들은 때론 받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인격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곤 한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곤 자연스레 그 위에 군림한다. 그것을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말이다. 혜진 역시 그랬다. 그 속에서 경학이 느끼는 모멸감과 자기혐오, 자격지심은 결코 가벼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참 애틋한 점은 이별에 있어 누구의 잘못도 쉽게 따질 수 없다는 점이다. 아니, 따지고 싶지 않다. 다시는 꿰맬 수 없는, 이미 벌어져버린 그들의 상처에 구태여 소독약을 들이붓고 싶지 않다. 그건 너무 잔인하고, 슬픈 일이다. 누구라도 그들과 똑같은 상황을 마주한다면, 비슷한 결말에 다다르지 않겠는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그 겨울,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햇빛에 제 몸이 녹아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한 발짝 움직이지 못하는 눈사람처럼. 





 우리는 대체로 비슷한 사람들 틈 속에서 살아가고,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비슷했던 조건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틀어질 때쯤, 이별은 서서히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들판의 잡초보다는 온실 속 화초에 가깝다. 어디서든, 어떤 조건에서든 쉽게 피어나진 못한다. 설령 싹을 틔우는 건 가능하다 쳐도, 꽃을 피워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알맞은 온도와 습도, 햇빛, 대기, 토양 등 여러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물론 꽃이 피어도 안주할 순 없다. 그러다가도 조건이 하나씩 틀어지면 결국 져버리고 말기에. 


 그들만의 온실이 없는 사람들의 사랑은, 다가오는 겨울을 견디지 못한 채 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겨울은 오고야 만다. 겨울이 오는 것이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겨울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안타깝다. 영화 속 경학과 혜진의 화초는 차가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져버리고 말았다. 겨우내 얼어버린, 차가운 사랑의 단면이다. 



ⓒ 사진 출처 :  <그 겨울, 나는> 스틸컷




- 덧붙임


 경학의 세상은 2,000만 원에 무너졌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떨까 생각해 봤다. 나는, 내 세상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모두가 기피하는 일은 있다. 그리고 경학은 한 단계, 한 단계 그런 일로 내몰린다. 한 개인의 경제적 몰락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은, 그 몰락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몰락한 사람들은 모두가 기피하는 일로 내몰린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 덕에 나의 세상은 오늘도 굉장히 편안하고 신속하다.  

 슬프지만, 세상엔 행복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나의 행복은 그만큼 누군가의 불행으로 상쇄된다. 어릴 적, 윤리 시간에 배웠던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마을에서 1명의 가혹한 노동을 통해 나머지 99명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불행한 한 사람의 처지를 눈감아야겠냐고. 이젠 코웃음부터 나온다. 이미 우리는 그 1명을 희생하며 살고 있다. 

 알량한 정의감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당장 나의 편의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그 희생을 앎에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무력감이다. 경학과 마찬가지로 그 겨울 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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