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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선 Mar 10. 2024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을 가다

- 별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바람이 지나가는 곳 -

어느새 시차 적응이 된 걸까? 밤새 푹 자고 눈을 뜨니 아침이다.

오늘은 용서의 언덕을 가기 위해서 카미노 길을 제대로 걷는 날이다.

팜플로냐 - 시수르 메노르 - 사리키예기 - 페르돈 봉- 우테르가 - 다시 팜플로냐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오늘 아침은  당번을 자처하고

어제 남긴 홍합 미역국에 밥을 넣어 푹 끓여  내고, 

김을 이용해서 계란말이도 만들었다.

누룽지에 숭늉까지, 

다들 든든히 먹읍시다.

기운 내서 걸어야 하니까.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든다.

날씨도 좋고, 조금은 달뜬 마음으로 출발 채비를 한다.


숙소와 가까운 나바라 대학 교정을 거쳐서 가는 길이라 대학에서 세요를 받고 

순례길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행 출발 전 다친 어깨와 무릎이 안 좋은 친구가 걱정 됐지만 

4년 전 눈앞에서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파르돈 봉을 

친구도 꼭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기에 체력 소모를 최소화 하면서 걸었다.

가을 햇살은 따갑게 내리꽂고 추수가 끝난 넓은 밀밭 사잇길은 끝이 안 보이는 듯 했다.

한두 명씩 앞서거니 서거니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이다 사라졌다.

그늘 없는 너른 들판을 힘들게 걸어 시수르 메노르 마을에 도착했다.

용서의 언덕까지는 시수르 메노르(Cizur Menor)마을에서 

긴 오르막길을 따라 8km를 더 걸아가야 했기에 마을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우리는 급 회의를 하고 친구는 택시를 불러 페르돈 봉 오르기 전 사리키에기 마을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마을 어르신의 도움으로 동네 택시를 부르고 친구는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사리키에기 마을로 향했다. 

마을까지 5킬로, 빨리 걸으면 1시간 안에 갈 수 있었다.

차 한  잔을 마시고 길을 재촉한다.



그늘이 없는 길을 걷노라니 가을 햇볕이 눈 사이로 스며든다. 

산비탈로 시선을 주니 

양쪽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과 그 사이 듬성듬성 뭉쳐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고혹적으로 다가온다.

어딘가 모르게 고흐 그림 속 장면과 닮아 있었다.

현지에 사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일 텐데 

무방비 순간에 목격한 장면이 심오하게 가슴에 꽂힌다.

언젠가 인생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 지금의 풍경이 내게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다.


오르막이 이어지는 길 끝에 사리키예기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안드레스 교회 앞에서 먼저 도착한 친구가 

명랑한 얼굴로 땀범벅이 된 우리를 반겨준다. 

마을 작은 상점에서 사과와 이온음료를 구입하고 

마침 부는 바람결에 심신을 맡긴 채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휴식시간을 갖는다.

나도 모르게 고독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산등성이 풍력발전기는 바람의 세기를 짐작하게 하듯 세차게 돌아가고 있다.

사리키예기 마을에서 흙길로 이어지는 파르돈 봉 정상까지는 1시간 거리가 남았다.

비포장 비탈길과 능선, 넓은 밀밭 귀리 밭이었을 사잇길을 지나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용서의 언덕이다.

원기회복한 친구와 함께 힘차게 출발을 했다.


마음가짐을 단단히 한 탓인지 어느덧,

순례자 기념물(쇠로 만든 중세 순례자 상)로 유명한 페르돈 봉 정상이다.

바람의 세기가 강한 지역이라서인지 강한 바람만큼 감동도 강하게 밀려왔다.


철재에 새겨진 글은 책에서 많이 봤던 글귀라 곧 알아볼 수 있었다.

별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바람이 지나가는 곳,

Donde se cruza el camminl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


"여기에 오길 잘했어"

멋진 전망이 펼쳐져 있는 언덕에서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용서의 언덕인데 누굴 용서해야 하지?

퇴직 전 후배와의 갈등이 불현듯 생각났다.

용서의 언덕을 넘어가는 사람은 모두가 용기와 자비를 갖추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글귀를 본 듯하다.

과연 이 언덕을 넘으면 그 후배를 이해하게 될는지....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  우테르가 마을에서 택시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출발했다.

자갈이 많고 지면이 불규칙해 오르막만큼 쉽지 않은 내리막길이었다.

극도로 안전을 요하는 길을 긴장하며 내려왔지만 날씨가 좋아서인가, 풍경이 좋아서인가

생각보다 빨리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한적한 오후에 시골마을의 따스한 평온함이 긴장하고 있던 마음을 무장해제케 한다.

 바람이 마을의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믿고 바람의 날을 정해 축제를 하는 우테르가 마을에는

순례자들이 버리고 간 운동화 속에서 다육이가 자라고 있었다.

담벼락에 걸쳐있는 배낭 위에  우리도 가져간 기념 배지를 달아 놓았다.



조용하고 이쁜 동네 탐방이 끝나고 순례자들의 쉼터 알베르게에서

궁금했던 순례자 코스 요리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미 도착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순례자들과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하며

젊은 주인이 틀어주는 남미풍 음악에 몸을 둠칫둠칫 흔들고

와인을 나누며 서로를 축하하고 격려했다.

알베르게 주인에게 부탁하여 동네 택시를 부르고

종일 걸렸던 길을 단숨에 달려 팜플로냐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빌바오를 향해 출발할 버스를 검색하는 친구들, 내일은 또다시 새로운 하루가 될 것이다. 

빌바오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경험을 생각하니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은화처럼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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