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우선 Apr 23. 2024

당일치기 미식여행 루고


지금은 새벽 2시 30분

소음을 내서는 안되는 시간이다.

식탁 끝까지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그림을 그리며 지나 온 시간을 되짚어보는, 오롯이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이다.

창밖 풍경 한번, 펜 그림 한번, 

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낮게 드리운 회색 구름 사이로 분홍빛을 드리우며

아스토르가 아침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친구들을 깨운다

12시 체크아웃이지만 

루고 마을을 경유하여 사리아로 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

남은 밥과 야채를 넣어 볶음밥을 준비하는 동생의 손길이 분주하다.

감사한 한 끼를 챙기고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선다.


밤새 마음을 사로잡던 빗소리였지만

내린 비로 도로가 제법 미끄럽다. 

저 멀리 길 끝에 걸음이 느리다며 

먼저 걸어가던 친구가 손짓을 한다.

혼자 가려니 무서웠다나......ㅎ 왜그래, 천하무적 그대가......ㅎ

소프라노 성악가인 친구의 귀여운 투정이 계속된다.


등에 짊어진 배낭과 

보조가방 하나씩을 어깨에 둘러매고

버스터미널을 향해 걸어간다.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부엔카미노를 외쳐준다. 

우리도 답례로 부엔카미노~~



예정 시간보다 15분 늦게 루고행 버스에 탑승했다.

마을을 빠져나온 버스는 깊은 산속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길모퉁이가 휘어질 때마다 안개의 기습을 받아

아련한 풍경이 이어진다.

비는 그쳤지만 운무가 산 정상을 휘감고 돌고 돈다.

졸고 있는 나를 친구가 깨운다.

"봐 봐, 무지개야!!"

차창 밖으로 근사하고 멋진 일곱 빛깔 무지개가  

길게 반원을 그리며 숲속에 걸쳐 있다.

선명하게 떠오른 무지개를 보니 

앞으로 남은 여행을 기대하는  마음에 행복감이 차오른다.



두 시간을 달려 루고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싸늘한 공기가 몸을 웅크리게 한다.

한나절의 루고 투어를 위해 서둘러야 하는데 좀처럼 사물함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찾긴 했지만 다른 터미널과 다르게 직원이 관리하는 보관소에

맡길 짐의 총 무게 금액  4유로를 지불하고 도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적당히 쌀쌀한 바람과  따사한 햇빛의 조화가 걸음걸이를 가볍게 한다.

친구들이 예전에 와 봤다는 뽈뽀 맛집에서 점심을 하기로 해

2킬로를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시에스타 시간 없이 영업 중인 뽈뽀 식당은 맛집답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 식탁 위에 근사하고 맛난 음식이 차례로 놓인다.

식전빵, 야채샐러드, 샹그리아, 뽈뽀, 스테이크 그리고 카페 쏠로 까지 완벽하게 해치우고 

동시에 그림도 시간 맞춰 그려낸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샹그리아 과일주의 새콤달달 시원한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한다.


그림을 보며 좋아해 주는 사장에게 새요와 싸인을 받았다.

한 장 한 장 채워지는 저널 북을 보니 뿌듯하다.

내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든 내겐 추억의 장소를 그림으로 남길 수 있는 지금,

멋지잖아, 나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기록하는 열정적인 모습이......



로마시대에 건설한 성벽이 온전하게 보존된 세계 유일의 도시,

푸릇한 이끼가 역사를 얘기하고 성벽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웅장하고 멋스러운 도시에 도착했다.

예전에 왔던 기억을 되살려 앞장서 걷는 친구들을 따라 열심히 걷는다.


우산을 나눠쓰고 벤치에 앉아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는 멋쟁이 노부부

바람으로 떨어진 낙엽을 쓸어 담는 청소부

간간이 보이는 순례자들

사리아 가려다 루고에서 1박 한다고 한국말로 또박또박 얘기하는 대만 처자


신 · 구 도심의 풍경이 묘하게 대조를 이루는 

도시를 걷는 내 마음도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벼룩시장과 엔티크 상점을 꼭 찾아다녔다는 친구들은

3년 전 엔티크 상점을 몽땅 털다시피 했던 상점을 물어물어 찾아갔으나 

코로나로 1년 전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다.

결국 골동품은 구경도 못했지만

영롱한 색으로 만들어진 귀걸이 한 세트씩 구입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흩뿌리며 내리는 비도 피하고

핸드폰 충전을 위해 들어간 베이커리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며 느긋한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카페 주인으로 인해

날마다 조금씩 행복해져 가는 나를 만난다.


사리아행 버스에 올랐다.

달리는 차창밖으로 비가 또다시 흩뿌린다.

언제까지 비가 오려나...... 

사리아에서 부터는 진짜 걸어야 하는데......

작가의 이전글 노을이 아름다운 아스토르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